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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혜 <참 괜찮은 눈이 온다>
오랜만에 따뜻한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화자의 추억을 따라 예전 어릴적 내가 살던 집 골목길로 돌아가 봅니다. 이젠 어디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 하지만, 아직도 동무들과 해질무렵까지 다방구, 땅따먹기, 술래잡기 등을 하던 그 공터와 골목의 잔상은 아련히 남아 있습니다.
뽑기 아저씨가 텃밭인지, 공터인지 좌판을 깔고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병아리가 어미닭으로 부터 모이를 나눠먹듯 자기 순번을 기다립니다. 얼마전 친구로부터 달고나 얘기를 듣고 온라인쇼핑으로 그 추억을 맛봅니다.
나무 그늘을 지붕처럼 덮고 있는 가게는 더께가 앉은 물건들이며 발처럼 드리운 까만 고무줄 묶음이며 더도 덜할 것도 없이 구멍가게라는 표현이 딱 맞는 그런 가게이다. 그리고 그 사이, 나무와 작은 가게 사이에 섬처럼 평상이 하나 놓여 있다. 오고가며 비비댄 엉덩이들로 인해 닳고 닳은 때가 반질반질해진 평상이 있는 곳. 길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알라딘 ebook 34p)
언론고시 - 그 시절엔 4대 고시처럼 언론 방송사 들어가기가 어렵던 시절이라 이렇게 불렸습니다. - 에 연이어 고배를 마시고, 결국 4학년 여름방학때 한달여 인턴쉽을 했던 대기업에 입사를 합니다. 준비가 부족했던 바라 누굴 탓할 수 없겠지만, 대학입시 실패의 경험에 이어 인생에서 두 번째의 쓴 맛을 겪다보니 새로운 직장에 대한 적응도 쉽지 않았던 듯 합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과 하는 일에 대한 소극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생계를 위한 직장생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급여로 받은 얼마 안되는 돈은 집안 생활비로 들어가고, 챗바퀴돌듯 무의미한 하루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중2때부터 소원해진 아버지와는 부동산문제 외에는 대화할 필요성을 못느꼈던 것 같습니다. 은행 융자가 대부분인 집과 군사보호구역 지정으로 재산권 행사조차 할 수 없었던 계룡대 어딘가의 아버지 소유의 야산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부자간의 갈등의 골만 깊게 했습니다.
일주일 넘게 1월 1일자 신문을 들고 다니며 주위에 자랑하던 아빠는 한 달이 지나서야 시상식이라는 게 있고, 그곳에 내가 당신을 부르지 않았다는 걸, 시상식에는 다녀왔느냐는 다른 사람의 질문을 받고서야 알았다. 내가 너에게 그렇게 부끄러운 존재인 거냐, 아빠는 격노하다 조금 울었는데,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상금을 혼자 쓰려고 그랬다는 말은 아빠가 부끄러웠다는 말보다 더 나쁜 말이었다. 뭐가 아니라는 설명은 하지도 못하고, 아니라고, 그런 건 아니라는 말만 하다가 내가 더 크게 울어버리는 걸로 상황을 끝내버렸다. 그리고 일 년 후 그런 식으로 모아둔 비상금을 들고, 나는 도망치듯 집에서 빠져나왔다. (알라딘 ebook 114p)
심혈관질환으로 가슴이 답답하다며 어머니와 인근 대학병원에 가신 아버지. 수술이 급히 잡히고 바로 당일 입원수속을 위해 당신의 소지품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낡고 작은 수첩과 역시 낡은 지갑, 그리고 다른 소지품들과 옷가지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두 차례 수술 끝에 끝내 회복하지 못하시고 중환자실에서 달 반 고생만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분명 의료사고라 생각되는 점이 없지 않았으나 너무나 황망하고 경황이 없었던 터라 장례절차와 장지-추모공원-를 급히 마련하다 보니 병원에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수천만원의 병원비 영수증들. 어찌어찌 병원비 정산을 하고 나니 마이너스 통장 잔고조차 바닥을 드러냅니다. 혹시 모르는 아버지의 채무가 있을지 몰라 서둘러 가정법원에 상속포기절차를 밟습니다. 그러면서 충청도 어딘가의 아버지 명의 임야도 영원히 잊혀져 버리게 됩니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남긴 영수증은 2001년 11월 초에 발행됐다. 일부를 적어봤다. 한 달 월세보다 비싼 방에서 하루 먹던 식대보다 비싼 밥 드시고, 내가 마지막인 줄 모르고 사준 백만 원짜리 양복은 아깝다고 입지도 않더니 70만 원짜리 수의 입고 가셨다. 가계부 사이에 끼워져 있던 통장의 마지막 잔액은 2,473원. 나중에 사후 통장 정리하느라 은행에 갔더니 이것저것 빼고 백 원 정도가 남았던 것 같다. 나는 그 영수증들을 아빠의 가계부에 끼워놓고, 사는 일이 편치 않을 때마다 펴본다. 내가 5천 원짜리 전문점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빠는 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셨구나, 내가 애인과 놀러 다니던 날에 아빠는 찬 소주 한 병 안주도 없이 마셨구나, 마치 그 사실 때문에 사는 일이 편치 않은 것처럼 가슴을 두드리지만 모든 후회는 참회가 아니라 변명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알라딘 ebook 115p)
재수끝에 대학입시를 다시 한 번 더 치르고 아들은 아버지와 합격자명단을 보러 12월 어느 겨울날 그 대학 정문으로 향합니다. 아들은 어색하게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명단에 이름이 없네요.' 아버지 안색을 살펴보다 아들은 다시 말합니다. '장학생명단에 제 이름이 없네요.' 그리곤 합격자 명단의 제 이름을 가리킵니다. 기념촬영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휴대폰도 없고 디카도 없던 시절, 합격의 기쁨은 부자지간 근처 한식집에서 불고기 정식으로 채워 봅니다.
시험이 끝나고 터벅터벅 교문을 걸어나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웃으면서 나를 불렀다. 아버지였다. 만나자는 약속도, 기다리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서 우연처럼 만났다. 그 많은 수험생과 그 많은 학부모들과 그 넓은 대학 캠퍼스의 교문 앞에서 어긋나지도 않고 엇갈리지도 않고. 나중에 생각하니 신기했다. 휴대폰은커녕 호출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그 앞에 언제부터 서 있던 것일까. 시험은 어려웠고, 고사장을 빠져나오는 내 미래는 비관으로 가득했지만 교문 앞에 서 있던 아버지를 본 순간, 그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날마다 보는 아버지가 그보다 더 반가웠던 적이 있을까. (알라딘 ebook 201p)
아버지와 12월 합격자 명단을 보러갔던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가 어느덧 내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 큰아이와 같은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평행우주이론 처럼.
그렇지만 어떤 사랑이든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은 홀로 나선 길을 바라보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 그 길 앞에 서 있는 아이들과 부모 모두에게 그 용기가 함께했으면 좋겠다. (알라딘 ebook 204p)
내 유별난 욕심으로 공동육아와 대안학교를 다니다 일반 고교 진학을 한 탓에 그 전 6년간의 대안교육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입시로 상징되는 경쟁보다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참교육이라 믿었지만, 결국은 그 여정의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는 덕분에 12년간 찬찬히 준비해야 할 것을 3년 고교과정에서 치러내게 되었고 마음의 무게는 온전히 후회로 남게 된 듯 하여 내 마음도 무겁습니다. 긴 호흡으로 더디 가더라도 자신만의 속도로 제대로 가면 된다는 말들은 대학입시라는 커다란 관문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끝내 1등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고 또 한다고 해서, 언젠가는, 결국, 모든 것을 성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과정 아닌가. 1등 안 해도 돼! 나는 화면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바로 옆 레인에서 물살을 가르고 있는 내 아이에게도 해줄 수 있을까. 너에게는 너만의 속도가 있으니, 그 속도에 맞춰 살라고, 조금 져도, 늘 져도 괜찮다고, 과연 말해줄 수 있을까. (알라딘 ebook 219p)
아이는 힘들때마다 가끔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아이 말로는 돈이 많은 아이들은 입시에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냥 좀 준비해서 유학을 가면 된다고 합니다. 아이는 성적에 지칠때마다 말합니다. '그때 대안학교 가지 말고 일반학교에 그대로 있었으면 나도 지금보다는 더 잘할 수 있었을텐데.' 부자도 아니면서 뭘믿고 대안학교로 보냈는지 원망섞인 하소연 같습니다. 아이의 미래에 대한 준비도 제대로 못하면서 막연한 정의와 꿈만 쫓은 것은 아닐까.
가난해도 공부만 잘하면 다 용서되는 학력주의자와 공부를 잘해도 가난하면 용서가 안 되는 계층주의자 중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 가끔 농담처럼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지금은 둘 중 누가 더 많을까. 누가 더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가난해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자본이 꿈을 제한하는 사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알라딘 ebook 265p)
이 또한 지나가리라. 먼 훗날 되돌아 보며 추억을 하겠죠. 내가 그런것 처럼 내 아이들도.
삶은 결국 자신의 몫인가 봅니다. 그리고 잘 이겨낼 수 있으리란 희망을 놓지 않기를...
나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생존이란, 삶이란 순간이 아니라 영속성을 가진 시간을 가리키는 거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당신들, 살아갈 당신들이 저마다의 힘으로 끝내 버티기를. 나는 가늘고 길게 쥔 펜으로 앞으로도 계속 당신들을 쓰고, 나를 쓰고, 이 삶을 기록해볼 작정이다. (알라딘 ebook 29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