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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김영하 산문
분명 그와 나는 비슷한 시기, 아마도 89년부터 최소 3~4년은 같은 공간(신촌)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는 그의 존재를 전혀 몰랐고, 그렇게 그 시간은 지나갔다. 그리고 캠퍼스를 떠나 사회에 진출해서 그를 처음 접한 것은 99년 여름 무렵이다. 첫 장편소설<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등단작품인 '거울에 대한 명상'이 수록된 첫번째 소설집<호출>, 그리고 두번째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이 세권을 한꺼번에 샀고 그렇게 그와 10년만에야 비로서 만나게 되었다.
"첨단의 도시적 감수성으로 세기말의 악마주의적 심성을 세련되게 제시한 점에서도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 신세대 작가의 기수!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펙타클한 상상력!"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와 전복적 상상력. 그로테스크한 현실 해석과 섬세하면서도 도발적인 인물들의 창출로 표피적인 우리의 일상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세계로 바꾸어버리는 그만의 독특한 소설 세계를 펼쳐보인다."
내게는 20세기말 그의 등단이 마치 그와 너무나도 잘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의 작품을 찾게 되었다.
<아랑은 왜>, <오빠가 돌아왔다>, <검은꽃>, <퀴즈쇼> 등.
그리고 어느 덧 20년이 흘러 예전보다는 조금은 소원해 진듯하다.
그의 산문집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여행산문집이다. 얼마전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알쓸신잡'이란 여행토크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존재감은 작가를 넘어서 자기만의 주관이 뚜렷하고 어쩌면 유시민작가와 '대적(?)'할 수 있는 내공이 있는 몇 안되는 사람처럼 부각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의 신간 여행산문집에 선뜻 손이 간것일 수도 있다. 하는 일의 성격상 해외출장이 잦은 것과 요즘 트렌드 같은 여행산문집이란 장르가 뭔가 서로 끌리는 것이 있는 듯 하다. 평소엔 그닥 흥미가 없던 장르였는데, 얼마전 읽은 김연수의 <언젠가, 아마도>란 책의 영향도 있는 듯 하고.
여행과 글쓰기가 작가에게 왜 중요하고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떤 의미인지 그의 독백은 줄곧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83/335)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아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듯이 한 세계를 내 맘대로 만들었다가 다시 부수는, 그런 재미난 놀이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우선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그 낯선 세계에서 나는 허용된 시간만큼만 머물 수 있다. 그들이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또다시 낯선 인물들로 가득한 세계를 찾아 방랑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자 마음이 참 편해졌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98/335)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익숙함과의 결별, 즉 낯선곳으로 떠나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특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 작가는 늘 창작의 고통을 즐겨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김명남 옮김, 책세상, 2014, 87쪽.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101/335)
리베카 솔닛은 걷기와 방랑벽에 대한 에세이*에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생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방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철학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 이를테면 사상은 옥수수 같은 곡물과 달리 안정적인 수확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한곳에 머물기 어렵다는 것. 인맥이나 터전에 얽매인 직업, 대표적으로 정치인이나 농민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 Rebecca Solnit, 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 New York: Penguin Books, 2001, p.15.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118/335)
내가 대추(반려견)와 늘 산책하는 것은 생각과 경험의 관계와 어떻게 같은 것일까?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127/335)
물론 수렵채집활동 시절의 DNA는 아직 남아 있을 테지만,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정주생활로 굳어진 바 따로 그 본능을 표출하기 위해서는 여행이 필요하겠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133/335)
내가 한 여행, 내가 쓴 글만이 아닌, 세계(타자)의 여행 경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 뿐 아니라 나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181/335)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228/335)
낯선 곳에선 나도 낯선 이가 되리라. 익명성.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237/335)
여행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쓰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면서 부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고향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여행지에서 쓰는 가면이 조금 낯설 뿐이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243/335)
여기 인용된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도 일종의 긴 여행기다. 신들에 의한 운명지어짐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의지가 그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낯선 곳(외지), 낯선 이(타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여행자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인데, 글쓰기 또는 글읽기도 마찬가지일까?
이 일화는 흔히 오디세우스의 영리함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알려졌지만, 나는 여행자의 바람직한 마음가짐으로 읽었다.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달라진 정체성에 적응하라, 자기를 낮추고 노바디가 될 때 위험을 피하고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285/335)
2800여 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했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289/335)
현실과 여행의 같은 점, 소설과 여행의 닮은 점도 고개가 끄덕여 진다.
이주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반면 여행자는 정제된 환상을 경험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주와 여행의 관계는 마치 현실과 소설의 관계와 같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309/335)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중략)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중략)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318~320/335)
그런데, 작가는 이런 소설쓰기와 여행의 관계를 비틀어 버린다.
현실을 기반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 낯선 곳(창작의 세계)가 현실을 대체하는 것의 쾌감이 더 큰 경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원심력에 대한 자발적 의지'?
아마도 그는 다시 떠났을 것이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323/335)
‘여행의 이유’를 캐다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알라딘 eBook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중에서(p.331/335)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