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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 

by Alain de Botton



차례

I. 인기 없는 존재들을 위하여 (소크라테스)

II. 가난한 존재들을 위하여 (에피쿠로스)

III. 좌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세네카)

IV. 부적절한 존재들을 위하여 (몽테뉴)

V. 상심한 존재들을 위하여 (쇼펜하우어)

VI. 어려움에 처한 존재들을 위하여 (니체)


국내에선 애독자층이 비교적 두텁다는 알랭 드 보통. 그런데 그의 책이 내겐 그 명성에 비해 좀 생소하다. 부러 피했던 것은 아닌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책에 대한 이른바 대중서적이란 약간의 편견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싶다.   

이 책은 서양철학사에서 대표적인 사상가 여섯명에 대해 쓴 철학서 이다. 그런데, 다른 책과는 달리 그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각자의 삶을 대입시켜 보도록 구성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론 인기가 없거나, 가난하거나, 좌절하거나, 부적절하거나, 상심하거나, 어려움에 처하거나 하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이 여섯명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이 우리 같은 보통사람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고매한 이론이 아니라, 각각의 철학적 사상이 불환전한 존재인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 한 것인지 옆에서 조곤조곤 이야기 해 주고 있는듯 하다.  


18세기 말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의 캔버스('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면서도 그의 친구와 제자들 사이에서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데아(이성)과 죽음 후의 삶(이데아;영혼)을 믿어서 였을까? 참 그는 왜 500명 아테네 배심원의 과반 이상에게서 유죄를 선고받을 수 밖에 없었을까? 반론을 통해 상식을 검증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에 대해 사람들은 호불호가 갈렸을 것이고, 그에게 이성과 논리로 상대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당시의 소피스트들은 인정하기도 싫고 그가 눈엣가시 처럼 못마땅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시대적 분위기도 그가 비호감적인 외모를 가진것도 희생양이 필요했던 그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성이 뛰어나 인기가 없었던 존재 소크라테스. 


감각적 쾌락을 강조했던 에피쿠로스. 그는 사람들이 실은 오랫동안 생각해왔음에도 드러내놓고 철학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쾌락(pleasure)'을 철학의 시작이자 목표라고 말했다. 쾌락주의(Epicureanism)의 핵심은 무엇이 행복하게 할까라는 질문에 직관적으로 답하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가 서툴다라는 데서 출발한다. 의례 쾌락을 추구했다면 화려하고 부유한 삶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에피쿠로스는 오히려 소박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쾌락의 기본 요소들이 전제가 된 삶이다. 에피쿠로스의 행복을 위한 구매 리스트에는 우정, 자유, 사색이란 의외로 소박한 철학적 요소들이 있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는 소박한 의식주 정도면 충분하다. 

철학하지 않고 돈과 같은 물질적 재화에만 신경쓰다 생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일례로 "실제로 일어날 시점에 아무 문제도 야기하지 않을 어떤 일(죽음)을 두고 미리 걱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 이란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 지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Carpe diem.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그렸던 다비드가 그린 같은 분위기의 작품이 하나 더 있다. '세네카의 죽음'이 그것이다. 한때 그의 제자기도 했던 폭군 네로 황제의 자결 명령을 담담히 받아드린 세네카, 그는 스토아 사상가의 거두답게 자신의 죽음조차도 '철학적' 으로 승화시키려 했다. 왜 그랬을까? 그의 삶의 역정 자체가 좌절과 극복의 연속이었다면 이 질문에 적절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젊어서 결핵으로 앓다 느즈막히 정치에 발을 담았지만 모함으로 유배생활을 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왔을때 주어진 직책이 15년뒤 가족앞에서 자결을 하게 명한 어린 네로의 가정교사라니. 좌절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었던 세네카의 사전을 보면 분노(광기), 충격, 불공평, 근심, 조롱에 대해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가를 여러 예시를 통해 들여준다. 좌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성취를 이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론 무모한 저항보다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성적인 순응(독배를 마시는 것)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인 것을 그는 몸소 보여준다. 

"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 것을."<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문>


16세기 프랑스 보르도 인근 한적한 녹지에 자리한 성주였던 미셸 드 몽테뉴,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 당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요즘으로 치면 50대 정도로 볼 수도 있다 - 일찌기 공직에서 은퇴하고 그의 성 3층 원형서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천여권의 그리스-로마 고전을 읽는 것이 삶의 큰 위안이었다 한다. 그렇지만 마냥 이성을 찬미하던 이성 시절을 추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성(정신)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동물들의 삶을 주목했다. 키케로 같은 철학자 처럼 허울같은 이성의 울타리에 갇혀 있느니 '염소'의 유유자적한 삶을 바랬을 지도 모른다. 그 전까지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정신에 의한 육체의 통제시도 보다는 육체와 정신의 조화라는 솔직한 대안을 몽테뉴는 제시한다. 방귀도 참아야 하고, 성적 행위를 부적절하다 생각하고, 외향에 신경쓰는 형식적인 삶은 부적절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이후 전해진 그들의 문화를 접하고 많은 이들이 옷도 제대로 입지 않는 야만인으로 치부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짐승'으로 보고 싶었던 침략자들은 그렇게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몽테뉴가 살았던 그 시절 불과 50여년 사이에 신대륙 원주민 인구는 1/8로 감소된다. 그러나 몽테뉴는 비록 문명과 야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문화의 다양성과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학문(learning)과 지혜(wisdom) 차이를 이해했고, 지적 허영을 충족시키는 것 보다는 쉽게 쓰고/읽히고 그것이 삶에 유익한 것이라면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제 그가 쓴 <수상록>을 읽을 차례다. 1,400쪽에 달하는 그의 책은 과연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게도 좋은 책일까 궁금하다.


몽테뉴보다 255년 뒤에 태어난 아르투로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마음(정신;이성)은 육체(본능 포함)에 종속되어 있다는 몽테뉴의 사상에서 더 나아가 그러한 '본능적인 욕구'에 대해 구체적인 개념을 부여한다. 그것이 바로 '생에 대한 의지(will-to-life)' 다. 

"그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그리고 삶의 불행에서 그는 이제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보다는 전체로서 인류의 운명을 더 돌아볼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고통받는 존재로서보다는 세상을 아는 존재로서 행동해야 할 것이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품위있는 인간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라고 선언하며 마치 그의 사후 100년 뒤를 예언하듯이 "2000년경이면 사람들은 [나의 저작을] 읽도록 허용될 것이다."는 자기 확신을 한 사람, 니체. 

그의 나이 21살 되던 해 가을, 라이프치히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조우한 책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이었다. "가장 분별 있는 인간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애쓴다."고 했던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젊은 니체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리하르트 바그너 부부와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그러나 30대 초반 이탈리아 여행 중 쇼펜하우어의 "수줍은 사슴처럼 숲속에 숨어 안주하려는" 염세철학을 뛰어넘는 각성을 하게 된다. 

인류 역사를 통해 완벽한 삶을 산 인물로 꼽았던 이들(영웅)을 통해 "위버멘쉬(Ubermensch; 초인)" - 수퍼맨(Superman)으로 흔히 잘못 알려졌다. - 의 개념을 설파했던 니체는 당대 현세의 인물에서가 아니라 이미 죽은 지 오래된 16세기의 몽테뉴, 18~19세기 초반의 괴테와 스탕달 같은 인물들을 꼽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호기심 많고, 예술적 재능이 있고, 성적으로도 왕성했으며, 이 세상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러니 하게도 니체는 이들과의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자신에게 없는 탤런트가 인간 존재의 완성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는 아이러니는 현실의 고통과 비참함을 통해 자기 완성을 할 수 있다는 그의 자기 최면에 아마도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퇴고의 과정을 거친 <수상록(몽테뉴)>, 창작의 고통으로 탄생한 <적과 흙(스탕달)> 등과 같은 작품들은 마치 높은 산을 오르며 흘린 피와 땀을 통해 "위버멘쉬"를 꿈꿨던 니체에겐 진정한 클래식이었다. 

그는 3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평생을 따라다닌 건강 등의 이유로 스위스 바젤대학 고전문헌학 교수직에서 물러나 알프스 작은 마을에 7년간 칩거하게 된다. 여기서 그의 대표적 저작인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넘어서>, <도덕의 계보학>, <우상의 황혼> 등을 쓴다. 니체가 가장 사랑했던 화가 중 하나가 라파엘로였던 이유가 뭘까? 그건 라파엘로 자신이 당시 이미 거장의 반열이었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뛰어 넘을 수 없다는 좌절과 고통을 오히려 그의 예술창작을 위한 자양분으로 승화시켰던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심지어 니체는 술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이 점도 라파엘로와 스탕달을 좋아했던 공통분모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 점이 또한 "인생양조"적 삶을 지향하는 내게는 공감하기 살짝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다. 술(음주)과 기독교(말씀)를 본질적으로 같다고 동일시 했던 니체는 그 이유를 현세의 고통을 회피하고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내세(천국)를 꿈꾸는 삶의 태도라는 점에서 싫어했던 것이라 본다. 

반면 니체가 사랑했던 그리스철학자 에피쿠로스와 그의 공동체(친구)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평생 홀로 지낼 수 밖에 없었던 니체에겐 이 또한 가질 수 없는 고통이었고 "위버멘쉬"를 향한 고독한 여정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번번히 끌리는 여자에게서 퇴짜를 맞았던 - 사랑을 고백했던 루 살로메마저도 그의 친구 파울 레에게 갔다. - 니체.

결국 가난과 각종 질병으로 허약해진 육신을 추스리지 못하고 이태리의 한 광장에서 말을 부여잡고 쓰러지게 된다. 스스로를 디오니소스, 예수, 나폴레옹, 붓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신 등으로 생각했던 니체는 결국 독일의 한 보호시설(정신병원)에서 11년을 보내고 20세기가 시작되던 해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가 예견했듯이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영원히 "위버멘쉬"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을 마무리하며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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