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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Jesus before Christianity)>
앨버트 놀런
"이 책의 주목적은 믿음도 아니고 역사도 아닙니다.
이 책은 신앙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며 믿음과 상관 없이 읽도록 쓴 책 입니다. 아예 이 책에는 예수에 관하여 미리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이 없습니다. 읽는 이는 초세기 팔레스티나에 살던 한 인간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그 동시대인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고자 애쓰시기 바랍니다. 저의 관심사는 예수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이 되기 전의,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음이 우리의 출발점은 아니나, 저로서는 그것이 우리의 결론이 되기를 바랍니다. "
머리말 맨 앞부분에 나오는 저자 앨버트 놀런 신부(도미니코회 남아프리카 관구장)의 말이다.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되기 전 예수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시대를 통찰해 봄으로서 현 시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그 답을 찾을 때 예수는 자연스럽게 그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은 파국, 실행, 복음이란 총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젤로데(열성파), 바리사이파, 엣세이파(혁명주의자), 사두가이파(랍비, 사제), 제관장, 원로, 율법학자 등이 종교적인 지도자들 이었지만, '민족국가'란 정치체제의 한계에 이러한 기성 종교가 그 답이 될 수 없었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 가난한 사람, 소경, 절름발이, 앓는 사람, 중풍병자, 나병 환자, 거지,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불쌍한 사람, 죄인, 창녀, 셰리, 과부, 귀신들린 사람, 박해받는 사람, 억눌린 사람, 포로, 수고하고 짐진 사람, 율법을 모르는 무리, 군중, 작은 사람, 지극히 작은 사람, 꼴찌, 철부지, 어린이, 이스라엘 가문의 길 잃은 양
예수는 이렇게 '한계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죄인을 '용서'하는 과정(실행)에서 스스로 해방의 길잡이가 되고자 하였다.
무엇이 좋은 소식(복음; 예언)인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 혹은 어부의 밧줄이 - 바늘귀를 빠져 나가기 만큼 어렵다 한다.
꼭 필요하지 않은 여분의 '소유', '재산'은 분배와 나눔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의 개신교를 보면 이천년 전 예수가 꾸짖었던 기성종교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있는 듯 하다. 종교과세에 민감히 반응을 하고, 대형교회의 세습이 연일 말썽이다. 과연 예수가 지금 한국의 개신교를 보면 무엇이라 하실까?
자신의 생활 태도를 돌이키고, 자기를 낮추어 '어린이'(철부지; 교육받지 못해 무지한 사람)처럼 될 채비가 필요하다. ('스스로 낮추는 자가 높임을 받으리라')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변화(낙타->사자->아이)의 궁극의 완성은 자신의 의지와 신성한 긍정으로 창조의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아이'를 이야기 했다. 왠지 일맥상통하는 관점이다.
'겸손하자'는 몇년전부터 내 화두이다. 물론 부지불식중에 잘 지켜지지 않는듯 하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늘 겸손하고자 하나 쉽지 않다. 말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한 마디 말도 천금의 무게를 지닌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예수는 멀리 있지 않다. 비록 20대 초반 성당에 다니고 개신교회를 다니다 종교와 멀어진 삶을 산지 3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래도 예수의 삶은 종교의 의미를 떠나서도 본받을 점이 많다.
'파벌' 연대성을 극복하고 '보편' 연대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세 민족/나라는 지배와 압제를 통해 유지되지만, 하느님나라는 사랑, 봉사, 자유로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적대적 편가르기와 이념논쟁이 아직도 횡행하는 이 땅에서 과연 당시의 청년 예수라면 그는 어떻 말로 이 상황을 일갈하고 싶을까? 아마도 다음의 성경 구절로 대신할 수 있으리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