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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여행산문집>
작가 김연수의 산문집 <여행할 권리>(창비)와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에 이어 그의 세번째 책이다.
<론리플래닛> 편집장의 권유, 아니 꼬임에 4년이 넘는 여행기 연재를 하게 되었다는 작가는 계획성 없는 그의 삶에서 몇 안되는 계획대로 된 프로젝트가 꼬박 꼬박 달마다 잡지에 연재를 하고 종내 이 책을 엮어서 낸 것이라 한다. 물론 다 편집장 덕분이라 에둘러 말하지만.
동년배라 그런가, 아님 전공이 같아서 그런가, 아님 글의 문체가 낯익어서 그런가, 작가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왠지 나와 성향이 비슷하다는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아닌 그런데 나 같은 그런 친구.
국내외로 좀 알려진 작가라 그런지 이런 저런 공적인 일로도 해외 여행이 잦은 듯 하다. 물론 부로 홀로 떠나는 여행도 많은 듯 하지만. 왠지 김영하 작가와는 같은듯 또 다른듯 하다.
언젠가 아마도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다시 낯선 사람이 될 테지. 그리고 그 낯선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겠지. 언젠가, 아마도. 누군가를 만나리라는 것. 그게 나의 여행이라는 것.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알라딘 ebook <언젠가, 아마도> 9/396쪽)
낯선곳으로 떠나면 거기서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난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 그게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작가와 나와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맥주 애호가'. 작가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술이 아니던가. 론리플래닛 편집장과 원고를 핑계로 한달에 한 번은 의기투합하여 꼭지가 돌아가듯 서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난 일로서 그런 만남이 있던가? 실로 부러운 정경이다. 작가는 여행을 가면 현지의 맥주를 찾는다.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그리고 한정 판매를 좋아한다. 그래서 현지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맥주라면 반드시 먹고야 만다. 당연히 나는 그 펍에서 맥주를 마셨다. 맛은? 가서 마셔보면 알겠지만, 너무 차다.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차다. 그게 바로 레소토의 첫인상이랄까.(같은책 30/396쪽)
나도 그렇다. 출장을 가면 꼭 현지 local beer를 찾는다. 아니 출장길 비행기 안에서도 (국적기가 아니면) 그 나라 맥주가 있는지 물어본다. 하이네켄이나 버드 같은 것 말고. 심지어는 와인으로 유명한 칠레 산티아고를 갔을때도, 스페인 마드리드와 이태리 모데나에 갔을때도, 그리고 그리스 아테네를 갔을때도 내겐 와인보단 늘 맥주가 먼저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많은 그 지역 로컬 맥주도 사실상 거대 다국적 맥주자본의 서브브랜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와 같이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그러고 보니 1982년이던가 그때는 레이더스란 제목으로 극장에 걸렸던 것 같은데, <인디애나존스>(1)편을 보면 티벳인가 같은 곳에 주인공의 옛 여친이 하는 선술집이 있다. 여기서 술마시기 내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분위기는 딱 그런 분위기다.
바 주위에는 제멋대로 널브러져 맥주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여행자의 천국.
거기서 맥주를 마시는데 라디오헤드의 ‘How to disappear completely’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톰 요크가 ‘I’m not here’라고 읊조리는, 라디오헤드 특유의 우울한 노래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과연 완벽하게 없어지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생각하곤 했는데, 마침내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가장 완벽하게 잠적하는 방법은 인천공항에서 더반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뒤, 다시 자동차로 앰피시어터 백패커스 로지로 가는 일이다. 거기에는 맥주 마시기 좋은 바가 있으니까 사흘 정도 지내면서 곰곰이 생각해본 뒤에 그래도 정 잠적하고 싶다면, 드라켄즈버그산맥을 넘어 레소토로 입국한다. 도중에 사니 패스의 정상에서 맥주 1잔을 마시는 걸 빼먹지 마라. 그 이후의 맥주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으니까.(같은책 32~33/396쪽)
여행이든 아님 다른 하고 싶은 것이든 늘 마음 한켠에는 있다. 소위 버킷리스트라고도 하는 개인의 욕망-희망보다 이게 더 어감이 맞을듯-같은 거라고 할 수도 있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면 이 명단에도 없겠지.
막상 간절하게 원하면 쉽게 구할 수 없다. 이건 오르골의 법칙이다. 이걸 뒤집으면 쉽게 구할 수 없다면 간절하게 원하게 된다. 이건 도루묵의 법칙이다. (같은책 39/396쪽)
그래서 일할 때도 쉽게 달성할 수 없는 목표-stretching goals-를 정하고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욕망의 돌을 산 정상까지 밀어올리려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개구장애라는 모대학 치대생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고 즐겨부르던 <엘도라도(El Dorado)>(1996년)란 노래에도 비슷한 가사가 있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 내겐 기대반 두려움반의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수많은 언덕사이에
갈곳을 잃어 버린 모습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 외로운 삶처럼
살아온것 같아
가끔 내가 포기한 것들에
어설픈 잠을 뒤척이듯
내가 떠나온
그 푸른 바다가
가장 빛나는
곳은 아닐까
작가는 또 다시 내 어릴적 기억을 소환한다. 김득구. 욕망의 도시 라스베가스 '시저스팰리스' 특설링.
처음에는 챔피언의 실력이 좋아 경기가 곧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도전자의 맷집도 좋았다. 사실은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게 탈이었다. 결국 경기는 14라운드에 도전자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됐다. 나는 당연히 내가 응원하는 선수가 이길줄 알았는데, 그는 졌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같은책 65/396쪽)
한 여름 더위는 차량 본닛에 달걀프라이를 할 수 있을 정도라는 곳, 야외의 특설링에서 그는 아마도 처음 타봤을 비행기의 장거리비행의 여독도 채 풀리기 전 링에 올랐으리라. 지금은 프로복싱이 거의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그 당시만해도 가진것 없이 몸 하나로 돈을 벌 수 있는 직종중에서는 그나마 유망한 것이라 많은 젊은이들이 프로복서의 길에 뛰어들었었다. 합법적으로 매를 맞고 돈을 버는 그런 일. 그렇게 그는 돈을 벌러 매를 맞으러 머나먼 이역 땅으로 갔고, 또 그렇게 죽었다. 그때 챔피언이름이 맨시니인가 그랬었고, 그도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그 이후론 잘 안되었다고 들은 것 같다.
작가는 이란의 고도 이스파한을 떠올리며 낯선 작가를 이야기 한다. 이름을 발음하기도 어려운 네덜란드 작가다. 매번 노벨문학상때 거론되는 소설가이자 여행작가로도 유명하다는 세스 노터봄이다.
세스 노터봄은 그런 작가다. 여행 가서 읽으면 좋은 작가. 공항 서점 여행기 코너에 꽂히는 작가. 이 작가의 책 옆에는 대개 폴 서루와 빌 브라이슨의 책이 있다. 그런데 께이스 노어떠봄이라면 무슨 책을 썼는지 모르겠다.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말했다시피 그 책은 진시황릉의 병마용처럼 책 더미 어딘가에 파묻혀 있다. (같은책 86/396쪽)
소개된 책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을 읽어보려는데, 절판이다. 도서관에서도 쉽게 찾기 어려운 작가라 그의 말마따나 '간절하게 원하면 쉽게 구할 수 없다'는 오르골의 법칙에 바로 적용되는군. 아쉽지만 그의 데뷔작 <필립과 다른 사람들>이나 여행산문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도 읽어보자. 그러다 우연히 얻어걸릴 수도 있을지 않을까?
출장이 잦은 내겐 작가의 '이코노미석은 지상, 아니, 천상 최고의 창작 공간'이란 글도 공감이 간다. 아니 장거리 비행 중 선택이 아닌 필수로서 이코노미석을 타고 가는 나로서는 한 번 참고할 만한 tip일 듯 하다. 그럼 나도 기분좋게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할 것만 같다. 잠자기 비디오시청 밥먹기 술먹기 말고.
하지만 혹시 비행기를 탈 일이 있다면, 그것도 유럽이나 미국으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기의 이코노미석이라면 이 사실을 잘 기억하기를. 이건 말 그대로 하늘이, 즉 3만 피트 상공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라면 그간 해결하지 못한 원고를 처리하겠지만, 일상에 치여 끝맺지 못한 일에 몰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친절한 승무원들이 시간에 맞춰 식사도 제공하고 화장실도 가까우니 다른 걱정거리나 방해 요인은 하나도 없다. 마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작가였다면 모르긴 해도 도착할 즈음에는 내리기 싫을 정도로 그 자리가 좋아질 수도 있다.(같은책 212/396쪽)
작가는 여행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말한다. 단순한 공간적 이동이 아니고 그 최종 목적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낯선 곳에서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것, 그것이 여행의 참 의미라면, 설사 여행이 아니더라도 내 삶의 방식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보는 것은 또다른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서 나의 여정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걸.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같은책 378/396쪽)
풍경과 여행자의 관계는 이와 같다. 낯선 풍경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여행자가 된다. 히말라야나 남극이나 아마존에 간다면, 나는 이전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떤 존재가 될 게 분명하다. 그럼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어떻게 하면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 나를 둘러싼 풍경을 바꾸면 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새롭고, 또 신기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때 나도 바뀐다. 그러므로 여행이 다 끝났을 때,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같은책 378~379/3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