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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 아리랑

libros 2018. 3. 11. 10:22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아리랑>



헬렌(님 웨일즈의 본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장제스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옌안으로 김산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1937년 '김산'과의 만남은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지금 이 혁명가의 귀중한 자산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영희선생님의 말씀처럼 그와의 만남은 내게도 실로 '우연'이었다. 


한달에 한 번씩 동네 책읽기 모임을 시작하고 처음 선택한 주제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로 정했는데,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간 이들이었고 그 중 많은 분들이 사회주의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독립투사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 <이자해 자전>, <천당하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15소녀표류기)> 등 몇 권의 '자서(自書)' 관련 서적을 먼저 구해 읽었다. 그리고 김원봉의 항일투쟁 암살보고서<약산과 의열단>을 읽다 마침내 <아리랑>을 만나게 되었다.       


1980년대 엄혹한 시기, 제도권 교육에서 전혀 언급될 수 없었던 절반의 역사가 있다. 1948년 남한만의 이승만 단독정부가 설립되면서 친일청산이 미완으로 남고, 이어진 한국전쟁, 그리고 5.16과 12.12 군사쿠데타로 인한 긴긴 군사독재를 겪으며 이 땅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온 것이 이른바 '좌익' 이었다.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제의 무력과 파리평화회의의 배신으로 피의 좌절을 맛보며, 우리 민족 해방을 위한 여러 움직임이 생겨났고 진영은 크게 둘로 나누어 진다. (미국을 추종하는 이승만과 같은) 미국 유학파 민족주의자가 그 하나요,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이후 그 영향을 받은 혁명주의자가 또한 하나다. 앞의 진영이 보신을 하며 살아남아 해방이후 이승만을 필두로 남한 단독 정부의 권력을 쥐게 된 반면, 혁명을 꿈꾸던 이들은 20년대와 30년대 조국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소련과 중국의 혁명에 직접 참여하면서 대부분 목숨을 잃게 된다. 김산도 만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그들 중 하나의 별이 되었다. 해방과 분단이후 남은 혁명가들 대부분도 북의 정권에 합류한 까닭으로 그들은 우리의 역사에서 기록으로 남지 못하고 잊혀져 갔다. 


김산을 만나 인터뷰한 자전적 구술 기록인 이 책은 1941년 초판에 나와 있듯이 김산과 님 웨일즈의 공저로 볼 수 있다. 김산이 트로츠키주의자 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중국 적군에 의해 비밀리 처형당한 이듬해, 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하던 무렵, 그녀는 1939년 필리핀 바기오에서 <아리랑> 집필에 전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대지(The Good Earth)>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펄 벅(Pearl S. Buck) 여사와 남편(Richard Walsh) 덕분에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님 웨일즈는 어렵게 이 책을 출간하게 된다.  


"마르크스와 레닌주의의 교과서는 잉크로 쓰인 것이 아니라 피와 고통으로 쓰인 것이다." 

"The textbook of Marxism and Leninism is not in ink but in blood and suffering."


33년의 길지 않은 삶 속에서 결코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사사로움을 멀리한 채 오로지 조선의 독립과 사람다운 세상, 그 혁명을 위해 그는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살았다. 어찌 보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모습으로 또 어찌 보면 '쿠바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쳐지지만, 오히려 내겐 김산의 모습이 그들에게 투영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중국의 장정에서 그의 치열했던 삶의 궤적과 생각들을 473쪽의 분량으로 모두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후 80년이 지난 지금, 하루 하루 개인의 삶을 신산하게 이어가고 있는 이 땅의 청년, 아니 모든 이들에게 그가 남긴 마지막 에필로그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인지 역사를 통해 한 번쯤은 되돌아 보게 한다.


"(...)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 없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밖에 없다. "

"(...) They failed in the immediate thing, but history keeps a fine accounting. A man's name and his brief dream may be buried with his bones, but nothing that he has ever done or failed to do is lost in the final balance of forces. This is his immortality, his glory, or his shame. Not even he himself can change this objective fact, for he is history. Nothing can rob a man of his place in the movement of history. Nothing can grant him escape. His only individual decision is whether to move forward or backward, whether to fight or submit, whether to create value or destroy it, whether to be strong or weak."  

  

굳이 사족을 하나 단다면, (김산의 구술을 님 웨일즈가 영어로 기록한 것을) 우리말로 번역할때 가능한 원문에 충실하려 했는지, 직역으로 일관되어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읽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조선인 혁명가의 귀중한 일대기를 이렇게 나마 만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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