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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

libros 2023. 6. 10. 09:16

흔적을 지워드립니다

마에카와 호마레 지음, 이수은 옮김 / 라곰

 

이 소설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김완 <죽은 자의 집 청소>, 3년 전 쯤 읽었던 에세이였는데, 이런 직업도 있구나 싶었던 책으로 기억합니다. 2017, 삶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던 시절이었습니다. 암흑과 같았던 그때 유일한 안식처가 된 것이 책읽기 였고, 거의 매일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그렇게 읽었던 책 중에 당연히 죽음이란 소재를 다룬 책들도 몇 권 있었죠. 셀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김완 <죽은 자의 집 청소>, 케이티 엥겔하트 <죽음의 격> 등등. 삶과 죽음은 샴 쌍둥이 같습니다. 태어나면서 떼어낼 수 없는 그런 관계죠.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는 늘 죽음을 등에 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고, 그 사실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양면으로 된 동전처럼 한쪽만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267p)

-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밀리의 서재

 

물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우리는 죽음이란 사실을 평소에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 등 어떤 계기가 있거나 할때만 잠깐씩 소환시킬 뿐이죠. 도호쿠 시골 어촌인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홀로 사는 이십대 초반의 아사이 와타루 역시 할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 합니다. 장례식 날, ’상복차림에 좀비 영화나 에로 영화를 빌려보러 비디오 대여점엘 가죠. 여기서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첫대목이 문득 떠오릅니다. 주인공 나(뫼르소) 역시 어머니의 죽음을 마치 남의 일인양 무덤덤하게 받아들입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16p) -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밀리의 서재

 

아사이는 바닷가 시골의 삶을 무료해 합니다. 도시로 와서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먹고 삽니다. “해파리 같은 삶이라 자조합니다. “사람들이 얕보지 않게전자사전으로 매일 표준어 연습을 합니다.

 

한적한 게 아니라 지루함을 졸이고 졸여서 잔뜩 응축시킨 것 같은 동네예요. 어렸을 때부터 그 동네에서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는데요. 그래서 일단 상경했어요.”

제 목표는 해파리 같은 삶이에요. 그저 도시를 떠다니는 거죠. 그런 인생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21, 22p)

- <흔적을 지워드립니다> 마에카와 호마레 지음, 이수은 옮김 / 밀리의 서재

 

아사이는 좀비와 에로 영화를 빌려 집으로 가는 길에 술 한잔 하러 꽃병이란 가게에 들릅니다. 여기서 데드 모닝사장 사사가와 케이스케와의 만남이 시작되죠. 둘 다 상복을 입은 인연으로 합석을 하게 되고 사사가와의 공짜술에 주거니 받거니 하다 맥주와 청주가 그만 폭주하고 맙니다. 사사가와의 상복 소매에 토를 하게 된 아사이. 아사이가 사사가와의 상복에 뭍은 것을 깨끗이 세탁해 주면서 둘의 두 번째 인연이 시작됩니다. 상복에 뭍은 흔적을 지워주게 되면서 죽음의 흔적을 지워주는 사사가와의 데드 모닝에서 일하게 되는 게 묘하게 연결 됩니다. ‘데드 모닝의 일이 어떤 것인지는 프롤로그의 첫대목에서 이미 후각의 강렬함으로 다가옵니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주위에 감도는 죽음의 냄새는 강렬했다. 틈새로 스며 나온 냄새가 집 안에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있다. 고약한 냄새는 순식간에 폐를 탁하게 만들고, 머리를 마비시킨다. (7p, 프롤로그)

 

모든 죽음의 장소에 등장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파리, 구더기, 체액(녹는다). 마치 삶과 죽음의 구분이 파리와 구더기가 없고 있고인가 싶기도 하여 살짝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다섯 죽음이 등장합니다. 고립사(생선 초밥), 20대 남성의 자살(흙 묻은 등산화), 동생의 죽음(반짝이는 전신 거울), 남편의 교통사고사(Special Blend Coffee), 모녀 동반자살(딸기 생크림 케이크). 그리고 딸의 죽음은 사사가와가 늘 입고 있는 상복처럼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레퀴엠(진혼곡) 같습니다.

 

사사가와는 죽음의 집청소를 하면서 그들의 죽음과 늘 공감합니다. 딸의 죽음 때문이죠.

고독사로 외롭게 죽어간 이가 초밥이 먹고 싶다고 했던 벽의 낙서를 보고 편의점에서 유부초밥을 사다주는 것도(생선 초밥) 그의 이런 단면을 잘 드러내 줍니다. 다만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무 어린 나이에 돌연사 한 딸 아이를 생각하면 그도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사가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자살입니다.

 

그런 거야. 죽은 사람은 성장할 일도 없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일도 없어. 정지된 상태야. 계속 말이지.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과거뿐이야.” (93p)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건 사치야.” (114p, 흙 묻은 등산화)

 

친했던 친구로부터 느꼈던 모멸감은 아사이의 전자사전이 떨어지며 깨진 금으로 남습니다. 해파리처럼 바다에 떠다니듯 아무생각 없이 살겠다고 했던 아사이도 데드 모닝일을 하면서 여러 죽음을 겪으면서 각성을 하게 됩니다.

 

해파리에 쏘이면 생각보다 아픈 법이다.’

익숙한 음성을 듣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가로등 아래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밤하늘에는 고향의 바다와 같은 짙은 푸른색이 펼쳐져 있었다. 그 속에 오려다 붙인 것 같은 초승달이 떠 있었다. (203p)

 

사사가와의 공감능력은 특수청소하기전 직업이었던 응급구조사로서의 의료지식을 통해 동생이 형에 대한 걱정을 했다는 대목에서도 드러납니다.

 

동생분은 카미야 씨의 환상통을 걱정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미러 테라피에 대해 알고는 키미야 씨가 직접 해볼 기회가 생겼을 때 거울이 지저분해서 효과가 안 나타나는 일이 없도록 아침마다 전신 거울을 닦지 않았을까요?” (226p, 반짝이는 전신 거울)

 

다만 친형제 간에도 이런 무관심한 죽음을 보게 되면 인간이란 존재는 결국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회의감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요.

 

결국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진짜 속마음은 평생 모르는 거야. 상대방은 내가 아니니까. 마음속까지 이해할 수는 없어. 머릿속도 들여다볼 수 없지.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이 서로 엇갈리고, 때때로 슬픈 결말을 맞는 거야. 난 항상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오늘 같은 일이 있어도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우리는 원래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운 존재니까.” (236p, 반짝이는 전신 거울)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옵니다. 하필 이런날에도 특수청소의뢰가 들어오네요. 1년간 묵혀두었던 남편의 유품 정리건입니다. 일을 하며 어느새 사사가와의 공감능력이 아사이에게도 전이가 되나 봅니다. 미망인에게 남편의 유품중 하나인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내리며 그를 기억하게 하죠. 그런데 아사이와 티키타카 같은 썸을 타게 된 특수청소폐기물 수거인 여사친가에데와의 크리스마스이브 데이트는 내맘대로 안되는군요. 그리고 다시 들른 카페 꽃병에서 에츠코(사사가와의 전부인)에게서 그들 관계와 어린 딸 요코의 죽음 이야기를 듣습니다.

 

난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어디선가 새 생명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날 때, 또 다른 누군가의 심장이 멎는다. 매일 반복되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이치가 묘하게 현실감을 가지고 가슴에 와 닿았다. (325p) - 같은 책

 

오랜만에 고향의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할머니와의 기억을 하나 둘 소환하게 되는 아사이는 엄마에게 열심히 살면 해파리도 뼈를 만난대.”하며, 삶에 대한 의지를 처음으로 내비칩니다. 엄마는 해파리의 비유에 대한 아들의 설명을 듣자 그 말뜻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삶을 응원합니다.

 

한마디로 살아 있으면 되는 거야. 살아가다 보면 너처럼 현재 막막한 사람도 언젠가 소중한 무언가를 만날 수 있을지 몰라.” (339p)

 

모녀의 동반자살 의뢰건을 통해 사사가와의 과거가 다시 소환되고 의뢰 수행 여부를 놓고 아사이와의 갈등도 고조됩니다. 그리고 그를 어둠의 심연에서 구하고자 합니다.

 

더 이상 그저 음침한 느낌의 회사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이름에는 사사가와의 뒤틀린 마음이 배어 있었다. 어두운 밤의 밑바닥에서 슬픔과 함께 살아갈 각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됐다.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376p, 딸기 생크림 케이크)

 

그런데 사사가와의 단호한 거부의 행동에 머뭇거리다, 해파리 이야기를 다시 떠오릅니다. 가에데의 말에 드디어 용기를 얻고 사사가와의 암막이 쳐진 집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암막 커튼을 띁어내 버립니다.

 

아니야. 계속 살아가다 보면 해파리라도…… 언젠가 다시 태어나거든. 소중한 걸 만나서…… 뼈가 있는 해파리로.” (385p)

밤의 어둠 속에서 데리고 나오고 싶다고? 그런 말은 누가 못 해. 그럼 누가 그 어둠 속에 발을 집어넣고 사사가와의 손을 잡을 건데? 그럴싸한 말을 아무리 늘어놓아도 아무것도 안 돼. 그런 말을 할 시간 있으면 네 손을 어둠 속으로 뻗어야지.” (387p, 딸기 생크림 케이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마치 바닷속에서 부유하는 해파리처럼 살던 아사이는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게 됩니다. 주머니속 전자사전의 표준어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말입니다. 그렇게 데드 모닝의 정직원이 되죠.

 

나는 계속 그 전자사전에 의지하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기만 했던 말들. 누군가와 진심으로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과거의 나는 이제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시시한 삶이 소중한 나날로 변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429p)

 

사사가와는 아사이의 설득에 이끌려 모녀의 동반자살 특수청소를 마치면서 요꼬의 탄생과 죽음이란 에서 마침내 살아가야 하는 희망의 을 다시 찾게 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결국 죽음은 그냥 인 거야. 반대로 이 세상에 탄생한 순간도 그냥 인 거지. 중요한 건 그 을 묶은 이야. 즉 살아 있는 순간을 하나하나 거듭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하지만 나는 요코의 죽음에 뭔가 의미를 찾고 싶어서 그 작은 을 계속 혼자 바라보고 있었어.” (439p)

 

사사가와의 데드 모닝은 죽음의 흔적을 지워줍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아무도 직접 하려하지 않는 냄새나는 타인의 과거 흔적을 치우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의 흔적을 통해 망자의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고 그속에서 작더라도 의미있었을 삶의 흔적을 레퀴엠(진혼곡)처럼 기억해 줍니다. 삶의 의미 말이죠.

 

카프카(Franz Kafka)는 말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477p)

- <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알라딘 ebook

 

오늘도 스위트피헌화로 데드 모닝의 일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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