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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강아지>라는 기상천외한 단편을 접하고, 김학찬이란 작가를 수소문하다 또 다른 재밌는 장편을 만나게 되었다. 6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한 <풀빵이 어때서?>란 작품이다. 추운 겨울 특히 생각나는 간식거리로 ‘미니잉어빵’을 점심산책길에 덕성여중고 골목의 단골가게에서 즐겨먹는 내겐 이 소설은 천생연분 같은 인연이다.

소설은 붕어빵의 명인(달인?) 아버지를 둔 이십대 후반 청년의 고군분투 타꼬야끼 명장되기 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루는데, 다음과 같이 그 문을 연다.

요즘 세상에 가업을 물려받는 일은 흔치 않다. 아버지가 무슨 회장님쯤 된다면 모를까. 가업이란 아무나 이을 수 없는 귀하디귀한 것이다. 어디 가서 “가업을 물려받을 계획이야”라고 말하면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가업을 잇게 하려는 아버지를 위해 어려서부터 일손을 돕다 군대에서도 고문관에서 풀빵 투스타(?)로 거듭난 ‘나’는 어느 순간 붕어빵에 지쳐버리게 된다. 부친의 용돈덕에 힐링을 위해 일본 여행을 간 ‘나’, 운명적 발걸음이 타꼬야끼 집으로 향하게 된다. 바로 눈앞에서 4DX 오감으로 펼쳐지듯 뜨거운 타꼬야끼에 대한 묘사가 괜히 내 입천장 마저 얼얼하게 한다.

둥글고, 화려했다. 카쯔오부시가 나긋나긋한 춤을 천천히 추며 전아하게 녹아내렸다. 뜨거웠다. 바삭바삭한 겉 부분이 순식간에 녹고, 진하고 따뜻한 것들이 왈칵 뿜어져나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순식간에 혓바닥과 입안이 촉촉해졌다. 간신히 입을 벌리자 모락모락 좋은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다시 입을 다물자 뜨거운 반죽들이 입천장을 향해 질주했다. 하아, 하아. 입을 여러번 여닫고 나서야 평정을 되찾았다. 우리나라 풀빵에서 찾을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반죽을 일부러 덜 익히는 풀빵이 존재하다니. 그 순간 문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아버지의 붕어빵 가업승계 의도와는 달리 우연한 오오사카 사부와의 만남은 ‘나’를 십여년간의 부자간 붕어빵 줄다리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타꼬야끼 외길인생으로 이끈다.

붕어빵이 붓글씨라면 타꼬야끼는 유화였다. 붕어빵이 된장찌개라면 타꼬야끼는 해물탕이었다. 반죽과 앙금으로만 만들어지는 붕어빵이 단순한 매력으로 입안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면 타꼬야끼는 다양한 재료의 융합으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군데 군데 위트있는 대목은 과하지 않은 양념 같다. ‘타꼬야끼의 이데아’를 통해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그 유명한 ‘동굴의 우화’도 소환되기도 하고…

타꼬야끼의 황금비율, 재료부터 시작해서 굽는 시간과 동작까지, 철저히 준비된 타꼬야끼의 이데아. 나는 비로소 동굴 감옥에서 해방되어 그림자 대신 진리를 보게 되었다. 그리스에도 타꼬야끼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소크라테스와플라톤이 사이좋게 세알씩 나눠 먹었겠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옆에서 군침만 삼키고. 아,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죽었지, 참.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순대 파는 덩치 박사장, 도우넛 하는 과묵 윤사장과 대학앞에서 푸드트럭으로 타꼬야끼 장사를 하는 ‘나‘는 어느 정도 학업성적이 되고 수능까지 봤지만 일찌감치 사회진출의 뜻을 두어 여지껏 왔다. 이즈음에 칙칙한 남자 등장인물들 사이로 한 몸매(?) 하는 이쁜 ‘현지‘가 등장하면서 ‘나’와의 ’티키타카 콤비 앙상블‘이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나‘가 임용시험 준비생 현지를 바라보는 몇몇 대목은 살짝 SNL 19금 수위를 넘나든다. 물론 지극한 상상력과 판타지의 산물에다 특유의 유머가 결합하여 과하지 않은 웃음을 준다.

그녀의 얼굴은 긍정적으로 보면 귀엽다고 할 만했다. 대신 가슴이 예쁘게 컸다. 타꼬야끼 스무알을 합친 것 같았다. 타꼬야끼 서른알 이상짜리는 거의 없고 열알만 되어도 평균 이상이었다. 대부분 타꼬야끼 다섯알짜리였고 한알보다 못한 여자도 종종 보였다. 스무알 그녀는 이틀에 한번씩 타꼬야끼를 사러 왔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웃고 있는 문어가 그려진 여섯알짜리 종이상자를 꺼내고, 굴리기송곳으로 타꼬야끼를 찍어 착착착착착착 순서대로 여섯알을 올리고, 그 위에 파슬리 가루를 살짝 치고, 카쯔오부시를 한움큼 토핑하고, 마요네즈 쏘스와 간장 쏘스를 가볍게 뿌렸다. 아, 당신은 너무 뜨거워요. 카쯔오부시가 녹아내리며 말했다. 아, 이 달콤한 맛.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위와 같이 마치 타꼬야끼가 살아 숨쉬는 여친 느낌이 나기도 하고, 사부인 ‘나’와 제자 ‘현지’가 다른 타꼬야끼 맛집 순례를 갈때는 이젠 대놓고 독자의 SNL 19금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한시간 후, 세번째. 현지의 헝클어진 머리에 땀이 묻어 있었다. 세번째를 마치고 나자 현지가 항복을 선언했다.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는데.
“사부, 더이상은 못하겠어요. 제발 좀 쉬어요.”
“아까는 기세등등하더니, 겨우 이 정도야?”
“이럴 줄은 몰랐죠…… 너무해요, 사부. 이건 거의 고문이라구요.”
“처음에는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한바탕 타꼬야끼 순례의 큰 일(?)을 치른 후 ‘나’와 현지는 삽겹살에 소주를 처음으로 같이 하며 서로의 처지를 이야기 하는데 여기서도 양념과 같은 사물의 의인화와 ‘나’의 능청스런 말걸기는 여전하다.

치이지칙. 불판 위에 놓인 삼겹살이 비명을 질렀다. 삼겹살 세줄을 얹고 양파를 올리고 나니 김치를 올릴 자리가 없었다. 김치를 집어들었다가 하는 수 없이 다시 내려놓았다. 미안하다 김치야. 다음 세상에는 삼겹살로 태어나거라. 최소한 양파라도 되렴.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과유불급. 주거니 받거니 사제간 소줏잔은 어느새 행복에 대한 철학 담론으로 가는가 싶더니 결국은 밤으로의 긴 여로로 이어지는구나…

“사부, 불행이라는 글자의 앞뒤를 바꾸면 행불이 되죠, 그쵸? ‘불’ 자의 ‘ㅜ’를 뒤집으면 행볼이 되고. 강제로, ‘ㄹ’에서 ‘ㄷ’ 부분을 버리면 그제야 ‘행복’이 완성되는데 조금 뒤집고, 조금 버리고 나면 불행이 행복으로 바뀔 수 있대요. 억지스럽다구요? 억지스럽지만 바꿔보는 것과 자연스럽게 그냥 내버려두는 것 중 어느 게 더 행복할까요. 제 이야긴 아니에요. 어디서 읽은 거예요.”
그날 밤 술 때문인지 모르지만,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었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타꼬야끼 사제간 운우지정의 행복(?)도 잠시뿐, 현지는 사라지고, 우여곡절 끝에 타꼬야끼 장사를 다시 시작한 ‘나’는 아버지가 방한 초청한 일본 사부와 재회하게 되고 세 사람은 어느새 어깨동무하고 ’위아더월드‘ 가 된다. 우려했던 붕어빵과 타꼬야끼 한일 대결과 갈등구조는 없었다. 오히려 세 사람은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한다. 한일 국가간 화해는 언제가 되려나…

선을 봤다. 여자가 물컵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려놓아서 안도했다. 터덜터덜 돌아오니 편지가 와 있었다. 편지를 받아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 무슨 고지서인 줄 알았다.
-알라딘 eBook <풀빵이 어때서?> (김학찬 지음) 중에서

떠난 제자(잠시 여친?) 현지로부터의 편지가 에필로그를 장식하며 한바탕 일장춘몽 같던 풀빵(붕어빵과 타꼬야끼)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입시교육, 자영업, 취업난, 고시, 임용시험 등 등장인물들이 대변하는 오늘의 현실을 작가는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낙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되 웃음마저 거세하지 않고싶은 마음이 괜히 독자를 웃게 하다가도 짠하게 하곤 한다.

최근 펴낸 김학찬작가의 첫소설집 <사소한 취향>도 기대가 된다. 이미 수록 작품중 두 편의 단편 - 우리집 강아지, 프러포즈 - 을 먼저 접해서 다시 그의 장기가 살아있음을 검증했지만 다른 단편들도 ‘꼬리까지’ 팥앙금 가득한 안양중앙시장의 붕어빵 맛집 같을지 사뭇 궁금하다.

날이 춥다. 설명절 지나면 우선 ’행복미니잉어빵‘ 부터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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