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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심장

libros 2021. 4. 22. 19:23

기린의 심장

- 이상욱

 

제겐 낯선 작가, 이상욱의 소설집 입니다. 

교유서가에서 가제본으로 받아 읽어 봅니다. 

 

표제작인 <기린의 심장> 포함하여 9편의 중단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작가나 작품에 대해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책을 펼쳐 보는데, 첫 작품 <어느 시인의 죽음> 부터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충격입니다. 

 

식인외계인들과 정치적으로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은 지구는 이른바 사회적으로 낙오된 부류의 인간 중 희생자를 선정하여 식재료로 바칩니다. 그 식재료인 인간을 조달하는 일을 처음 맡은 (이혼남) 대수는 등록금을 필요로 하는 외동딸을 위해 한 고등학교에서 존재감 없는 용천을 추천(?)받게 됩니다. 처음 맡은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한 가운데, 딸과 동갑내기인 용천의 시를 읽어보면서 결국 (먼저 불치병으로 죽은 아내를 따라)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자신을 용천대신 식재료로 희생합니다. 여기까지는 SF 호러물 같은 소재를 담담하게 그립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에 반전이 있습니다. #3이라고 하는 치명적 바이러스를 스스로 주입하고 식인외계인들을 멸절시키는 영웅이 될뻔한(?) 대수는 몰랐습니다. 그건 외계인들이 그들의 식재료에게 어떤 고통을 가하는 지와 그걸 못느끼게 하려는 일종의 마취제였다는 것을...

 

두번째 작품 <라하이나 눈(Lahaina Noon)>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습니다. 내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유일한 탈출구로 달리기를 시작한 주인공 나는 서로 다른 육체를 동기화 하는 기술이 비즈니스가 되는 세상에서 돈을 벌기위해 베타가 됩니다. 돈을 지불하는 알파와는 사이버자본주의사회에서 마치 주종관계 같습니다. 알파가 먹고 즐기는데 축적되는 칼로리를 없애기 위해 베타는 죽어라 달립니다. 자유가 없어졌습니다. 같은 베타였던 성재라는 동생이 결국 과도한 베타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사고로 죽고, 그의 누이였던 성주와 결혼하게 됩니다. 왠지 불길할 예감이 결국 적중합니다. 불치병을 앓다 먼저 세상을 뜬 아내에 대한 상실감에 희망을 잃고 더 이상 그림자를 피하기 위해 달리지 않습니다. 두달만에 체중이 배로 늡니다. 유골함에 든 성주를 데리고 그림자 없는 섬으로 떠나기로 하지만, 공항에서는 그 마저도 허용하지 않고 실랑이 끝에 유골함을 깨지고 134kg 거구의 나는 넘어지고 얼굴에 유골이 덕지덕지 뭍습니다. 구치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인적이 드문 길 위에 눕습니다. '조금 쉬어야겠다. 힘든 하루였으니까.' 그리고 인천공항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런데 역시 마지막에 반전이 있습니다. 그의 고객으로 그의 몸을 축냈던 알파와 그 두 아들의 '탈출한 돼지(나)' 시체에 대한 대화 장면은 소모품처럼 버려지고 교체되는 베타의 삶을 민낯으로 증언하는 것 같습니다.  

 

표제작인 <기린의 심장>은 마치 중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계열의 소설 같습니다. 주인공인 작가 나가 실랑이 끝에 한 파출소에서 밤을 보내게 되면서 경찰관 K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액자소설(소설속 소설) 양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심장이 좋지 않은 엄마를 위해 기린의 심장이 필요하다는 소녀, 그 소녀를 없애려는 동물원의 관리인 두 노인, 그리고 19번째 시험자인 젊은 경찰 K 가 주요등장인물의 다 입니다. 아, 물론 기린도 있군요. K는 시를 노래하고, 소녀와 장기를 두면서 가까와 집니다. 물론 그 이전의 18명의 마음이 지워진 시험자들처럼 함정에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하지만요. 비가 많이 오고 이번엔 K가 소녀를 구합니다. 관리인의 소녀를 죽이라는 명령을 듣지 않고. 아 참 마지막 대목에 무명의 필 레이먼드라는 60년대 흑인 록 가수가 등장하는군요. 왠지 관리인으로 부터 동물원을 해방시키고 싶어하는 동물원 주인 같습니다. K는 소녀에게 비몽사몽간에 열두살때 폐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헤어진 여자친구 이야기를 합니다. K는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기린과 동물원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얼룩진 욕망과 좌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린(작은 관리자?)은 마침내 K의 총에 쓰러지고 농구공만한 '기린의 심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의 주목도 끌지 못합니다.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동물원이 이 세상 어딘가에 진짜로 있을 것만 같았다.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과 오래된 오두막이 있고, 마음이 지워진 이들이 작은 언덕에 묻힌힌다는, 그 동물원 말이다.'(119p)

 

낯익은 동네 경상북도 문경에 살던 서른넷 공시생이 예지력을 갖는다. 그것도 원전 차폐막에서 흘러나온 방사선을 맞고. 그래서 <마왕의 변> 은 환경소설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인트로에 불과한 것이었네요. 기묘한 꿈을 기록한 그의 예언서와 그 속 주인공 '마왕' 과 '용사', 그리고 용사의 수행원 '철만'과 '가인'까지 등장인물들만 보면 마치 게임속 캐릭터들 같습니다. 

"단순히 눈을 떴다고 마왕이 되는 게 아니야. 스스로 자각을 갖고 악을 선택해야만 비로소 마왕이 되지. 그런데 악이라는 건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거든. 물론 선도 마찬가지지. 차이가 있다면, '선'은 의식적이고 가역적이고, '악'은 충동적이고 비가역적이라는 점이야. 충동적이고 비가역적인 악행. 그게 뭐겠어?"(135p)

그런데, 역시 독자의 허를 찌르는 이야기의 전개가 펼쳐집니다. 살인본능을 누르면서 강원도 시골에 부하들과 같이 농사를 짓고 책을 읽는 '마왕'의 모습이 오히려 '용사'와 그의 일행들 보다 더 인간적인 것은 왜일까요?

마지못해 용사 일행과 대적하던 마왕이 시공간의 문을 연다. 예전 마왕의 악행을 보여주다, 갑자기 '용사(심지)'의 과거를 보여준다. 상규 삼촌과 아버지의 죽음.

"상규 삼촌과 네 아버지를 죽인 건 누구였지?" 마왕이 물었다.
"사람보다 돈을 아까워하던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 심지가 대답했다. (146p)

마왕은 심지에게 대적하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자고 하나, 심지의 일행(가인)의 설득에 결국 마왕을 벤다. 

그것은 충동적이고 비가역적인 죽음이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심장에서 작은 얼음 조각이 깨어났다. (150p)

반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마왕을 죽임으로서 심지가 마왕이 됩니다. 그리고 예언이 성취됩니다. 

 

처음 뱀이 된 건 열두 살 때였습니다.(155p)

<허물>의 화자는 죽음을 암시하는 유언을 남기면서 뱀으로 변신했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릴적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시골 외할머니댁에 맡겨졌을때의 동심속 이야기에서 이혼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와서 대학진학과 그와 비슷한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아들을 얻을 때까지 이야기는 평이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죽습니다. 그 아들의 친구들도 영안소에서 마주합니다. 7년전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깊디 깊은 슬픔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아내와 그 뒤를 따르려는 남자.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따라 뱀의 길을 가려 합니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절망에 대항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저도 아내를 따라 이 낡은 육신을 버리려 합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176p)

 

전반부 네 작품에 비해 <허물>을 포함하여 후반부 다섯 편의 이야기는 그 결이 좀 달라 집니다.

유산과 이혼, 낙태를 무심히 다룬 <하얀 바다>, 아내의 죽음과 소원한 부녀관계속 고독이 드리운 <경계>, 왼손의 상실과 의도치 않은 죽음과 그 복수를 한 편의 연극 무대처럼 그린 <연극의 시작>, 마지막으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상실이 짙게 드리운 <25분>까지 읽다보면 그 건조한 문체가 상처같은 앙금처럼 남습니다. 

환타지와 리얼리즘을 넘나들면서 자본주의와 인간의 삶을 아이러니와 비판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반전의 작가, 이상욱님의 다음 이야기들도 기대해 봅니다.

#기린의심장 #이상욱

#교유서가소설 #신인작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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