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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세풀베다 장편 소설, 정창 옮김, 열린책들 

작년 여름과 가을 사이 파라과이를 두 해째 연속으로 출장갔었습니다. 공정무역 유기농 물품 관련 생산지 방문으로 다녀오게 된 것 입니다. 한반도에서 볼때는 지구 정반대편 - 대척점이라고 하죠 - 에 있는 멀고 먼 지역 입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3월부터 모든 해외 출장이 취소되어 버리고 파라과이도 예외는 아니게 되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에게 멸망당한 안데스 잉카제국의 후예 국가중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와 함께 남미 최대국 브라질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라과이를 떠올리면 예전에 보았던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이라는 영화와 예수교신부, 그리고 과라니 원주민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초기 대표작중 하나인 <연애소설 읽는 노인>(1989년)의 주무대가 예전 잉카제국이 있던 안데스산맥의 에콰도르와 페루를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어 아쉬운 마음에 더욱 반가웠던 것 같습니다. 

 

하늘에는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이 무겁게 드리워 있고, 밀림을 휩싸고 도는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미 우기에 접어든 날씨였다. 사위가 잔뜩 흐린 가운데 어디선가 불어 닥친 사나운 바람이 읍사무소 앞을 장식한 바나나나무를 흔들어 대며 땅에 떨어진 잎사귀들을 휩쓸어 갔다.

(같은책, 9p) 

 

무언가 저 아마존 밀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로 시작되는 이 짧은 소설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하에 원주민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종일 진료소 주위에 앉아 있던 히바로 족 ─ 스페인 정복자들이 야만인이라는 뜻으로 붙여 준 별칭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인 인디오 ─ 원주민들로 북미의 아파치들처럼 백인들의 관습에 물들고 타락했다고 해서 같은 원주민인 수아르 족에 의해 쫓겨난 자들이었다. 수아르 족과 히바로 족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비밀스런 아마존 유역에 대해 정통한 수아르 족이 콧대가 세고 자부심이 강하다면, 백인들의 누더기 옷을 걸친 떠돌이 히바로 족은 술이나 한잔 얻어먹을까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부류였다. (같은책, 14p)

 

이가 좋지 않아 틀니를 한 노인(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은 틀니를 아끼느라 민물새우 같은 가벼운 생식과 저작활동이 필요없는 술(아구아르디엔테; Aguardiente)을 원주민들과 다른 이주민들처럼 즐겨 마십니다. 

이주정착과정에서 아내를 잃고 홀로 살다 수아르족과 밀림생활을 하다 결국은 다시 정착민의 삶으로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됩니다. 어찌보면 자연(수아르족)과 문명(정착민) 사이의 경계인의 삶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홀로 사는 그에게 유일한 낙은 연애소설책 읽기 입니다. 노인의 책읽기는 서투릅니다. 글을 쓸 줄 모르는데, 글을 겨우 읽는 정도라 마치 어린아이가 밥을 꼭꼭 씹어먹는 것처럼 그렇게 한 음절, 한 단어, 한 문장을 읽어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읽는 방법이 왠지 정말 마음으로 책을 읽는 게 아닌가 싶네요.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같은책, 46p)

 

밀림 이주 정착과정에서 질병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오두막 집에는 그림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여기엔 젊디 젊었던 시절 젊은 부부의 모습이 있습니다. 노인과 아내 입니다. 엄청 긴 이름의 아내는 이 그림 속에서 긴 이름처럼 영원히 노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노인에게 이 그림은 그의 삶 그 자체 입니다. 

 

그 그림은 산간 지방 출신의 어떤 화가가 그린 젊은 남녀의 인물화였다. 그 속에 있는 남자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였다. 그는 오로지 초상화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하얀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반면에 그의 여자인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는 그 당시에 존재했고, 지금도 뇌리에 둥지를 튼 고독의 등에처럼 노인의 기억 속의 한 귀퉁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의상과 장신구 차림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머리에 두른 청색 벨벳 수건과 두 갈래로 나누어 길게 늘어뜨린 뒤에 식물성 기름을 발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은 머리칼 그리고 귀에 달린 원형의 귀걸이며 목에 두른 여러 개의 띠 모양의 목걸이와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면서 자못 위엄 있게 보였다. 또한 그녀의 조그맣고 붉은 입술은 오타발로 지방풍의 화려한 색실로 자수가 놓인 가슴을 강조하는 블라우스 위에서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같은책, 53p) 

 

아내를 떠나 보내고 노인은 우연한 기회에 밀림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그는 자유를 만끽 합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의 자유를 통해 인간의 문명속에서 켜켜이 쌓여왔던 미움의 감정에 평정심을 되찾습니다. 

 

자유라는 말은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밀림에서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그사이 차츰 밀림의 세계에 눈을 뜬 그는 주인 없는 푸른 세계에 매료되어 마음속에 간직해 오던 증오심을 잊었다.(같은책, 54p)

 

수아르족과 노인과의 대화 한 대목에서는 문명 사회속에서 바삐 살고 있는 우리의 일상을 곰곰히 한 번 되돌아 보게 합니다. 가치있는 삶을 위해 사회적경제 공정무역을 택했는데,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찾았는가 자문해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 한계 속에서 희망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그들이 연신 침을 뱉어 가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긴. 꼬리긴 원숭이들 만큼이나 상냥하고, 술 취한 앵무새들 만큼이나 말도 많고, 악마들 만큼이나 소리를 내지르는 악바리들이지 뭐.

  그들은 그 말이 맞다면서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고, 그것도 부족한지 방귀를 크게 뀌며 흡족한 기분을 표시했다.

 ... 중략 ... 

  「사냥을 하지 않으면 뭘 하는데?

  「일을 하지.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말이야.

  「저런 바보들 같으니라고, 다들 왜 그렇게 멍청하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밀림에서 5년을 지내고 나자 그곳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두 개의 이빨이 전해 준 메시지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같은책, 56p)

 

안데스와 아마존의 밀림속 자연은 늘 인간들로 힘들어 합니다. 인간의 탐욕이 문제 입니다. 노인은 다른 정착민들과 달리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밀림속 수아르족과의 삶속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다른 인간들은 노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훼손한 댓가를 치릅니다. 

 

밀림은 새로이 정착한 이주민이나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 때문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로 인해 사나워지는 것은 짐승들이었다. 조그만 평지를 얻고자 무차별하게 벌목을 해대는 바람에 보금자리를 잃은 매가 노새를 물어뜯고 번식기에 접어든 멧돼지가 사나운 맹수로 돌변하기도 했다.

  코카의 원전 회사에서 근무하는 양키들까지 짐승들을 괴롭히는 것에 한몫 거들었다. 그들은 마치 큰 전투라도 치를 듯한 화기로 무장한 채 떠들썩하게 나타나서 눈앞에 보이는 것은 가차 없이 갈겨 댔다. 특히 살쾡이 사냥을 나설 때면 어미건 새끼건 가릴 것 없이 사살 ─ 무려 열 마리 이상을 죽인 적도 있었다 ─ 한 뒤에 그 가죽을 벗겨 말뚝에 걸어 놓고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짐승의 가죽은 누군가 그것을 강으로 던지기 전까지 그대로 썩어 갔고, 그사이 살아남은 살쾡이들은 마치 보복이나 하듯 황소들의 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같은책, 72p)

 

마술적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다른 중남미 작가의 소설들과는 사뭇 다른 결로 자연과 환경 문제에 천착했던 세풀베다의 이 소설 역시 그 주제의식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사냥꾼에게 새끼들을 무참히 잃은 어미살쾡이와 더 이상의 무고한 인간사냥을 막아야 하는 노인의 대결 장면에서는 오히려 그동안의 사실주의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강렬한 한 편의 몽환적 그림을 보는 듯 합니다.  

 

일순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던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가 차츰 멀어지며 긴 초록색 지평선으로 빨려 들어가자, 어디선가 다시 나타난 새들이 안락함과 충만함이 깃든 메시지를 전하며 허공을 날아다녔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가 먹구름 밑에서 다시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비가 되어 온갖 나뭇가지와 칡넝쿨로 뒤얽힌 밀림 위에 떨어졌고, 동시에 밀림을 활활 타오르는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노란 혀를 날름거리는 화마를 보는 순간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악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설치류들이 그의 혀를 물어뜯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날아다니는 실뱀들이 그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가고 싶었다. 벽에 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가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 곁에 머물고 싶었다. 화마에 휩싸인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나타난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가 길을 막았다. 노란빛을 띤 두 눈동자는 그가 누워 있는 카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카누가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니 실제로 흔들리고 있었다. 순간 노인은 숨을 죽였다.(같은책)

 

아마존 밀림의 개발에 따른 훼손을 목도해 온 작가는 살쾡이의 죽음과 더 깊은 밀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수아르족의 운명을 통해 낙관적이지 않은 자연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칼을 버리고 연애 소설을 손에 드는 결말은 우리에게 아직은 그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상생할 수 있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 합니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틀니를 꺼내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같은책)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는 칠레 피노체트 군사 정권 하 반독재 반체제 운동에 주도적으로 활동하다 수감되었고, 주변국(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에서 연극 단체를 이끌며 UNESCO(유네스코) 기자로 활동하다, 1980년 독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바치는 이 소설을 발표하여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또 다른 환경소설 지구 끝의 사람들(1989), 그리고 자전적 여행소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1995)로 주목을 받습니다. 그리고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1996),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2016) 등을 통해 환경동화작가로도 이름을 알립니다. 귀향(1994), 감상적 킬러의 고백(1996) 과 같은 누아르 추리기법의 소설까지 다채로운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합니다. 

피노체트 군부독재에도 굴하지 않았고, 환경운동가와 작가로서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그도 올해 전 지구적인 유행이 되어 버린 코로나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영면한 날이 4월 16일 이라는 것도 더 큰 슬픔을 떠올리게 하니 이것도 운명인가 싶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에서 남긴 글이 마치 그의 운명을 예감하게 해 주니 마음이 더 짠합니다. 

 

마리치웨우 페니
(형제여, 우리는 앞으로 열 번은 더 이겨 낼 거야.) 

이는 누군가와 헤어져야 할 때 대지의 사람들이 작별 인사 대신 하는 말이다.

 

루이스 세풀베다 (1949.10.4 ~ 2020.4.16)

 

이제 그를 다시 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최근 국내 출간된 그의 마지막이 된 작품 역사의 끝까지》을 통해 그를 만나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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