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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도살장

libros 2020. 10. 2. 12:59

왼쪽은 초판 번역본, 오른쪽은 새 번역본

얼마전 커트 보니것의 <갈라파고스>를 읽었습니다.
다소 엉뚱하기 까지 한 독특한 문체와 디스토피아인지 유토피아인지 모를 모호한 미래상에 대해 작가는 또 열린 결말로 독자들을 살짝 난처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작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대표작인 <제5 도살장>을 다시 읽어봅니다. 문학동네에서 영미문학 대표번역가인 정영목님이 새로 번역한 판본과 함께 (절판된) 처음번역본까지 두 권을 샀습니다. 처음 번역본부터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새 번역본과 함께 대중판(문고판크기) 원서도 참조하여 보려합니다. 두 번역본을 비교하여 읽어보는 것도 좋지만, 이 분의 독특한 문체를 제대로 맛보려면 결국 원문을 들여다 볼 밖에 없을 듯 해서요.

 

이 작품은 포로수용소와 드레스덴 폭격의 참상을 직접 현장에서 경험한 작가의 반전문학이자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어느덧 45살이 된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1967년 드레스덴에 다시 간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은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대체로는 그렇다. 적어도 전쟁 부분은 사실 그대로다. 내가 실제로 아는 한 사람은 자기 것이 아닌 찻주전자를 챙겼다 해서 총살당했다. 내가 실제로 아는 또 다른 사람은 사감이 있던 사람에게 전쟁이 끝나면 총잡이를 사서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기타 등등. 이 책에서 나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바꾸었다.(10p, 박웅희옮김, 아이필드)

 

그런데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20대 초반 주인공의 기억을 소환하는 40대 중반이 된 화자의 1인칭 시점 소설이라고만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화자의 기억은 시공을 넘나듭니다. 

 

들어보라.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해방되었다.
빌리는 잠들 때에는 나이 많은 홀아비였지만 깨어 보니 자기 결혼식 날이었다. 그는 1955년에 한 문을 통과해서 1941년에 다른 문으로 나왔다. 그 문을 되돌아 나오니 1963년 이었다. 그의 말로는, 그는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고, 그 사이의 모든 사건을 무작위로 찾아간다. 그가 말한다. 빌리는 시간상의 발작 환자고, 가고 싶다고 아무 데나 갈 수 없으며, 그 여행들이 반드시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는 끊임없는 무대 공포증에 걸린 상태이며, 그 이유는 자기가 다음번에 연기해야 할 삶이자기 인생의 어떤 부분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36p, 같은 책)

 

시간여행을 하는 거죠. 그리고 그 능력은 다른 차원의 외계인들에게서 얻은 것 입니다. 그곳은 시간의 처음과 끝이 구분되어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동시에 봅니다. 그래서 주인공의 타임슬립(시간여행)도 현실과 과거를 수도 없이 넘나들게 됩니다.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서 현실로 다시 더 과거로 어리둥절한 독자들을 데려갑니다. 

 

트랄파마도어의 생물들에게는 우주가 수많은 밝은작은 점들로 보이지 않는다고 빌리 필그림은 말한다. 그 생물들은 각각의 천체가 있던 곳과 운행해 가는 곳을 동시에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늘이 미세하고 빛나는 면발이 그득한 스파게티로 보인다. 트랄파마도어 인들에게는 인간도 두 발 달린 짐승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커다란 노래기로 보인다. "한쪽 끝에는 아이들 다리가 달리고 반대쪽 끝에는 늙은이들 다리가 달린 노래기로 보인다고 한다.(106p, 같은 책)

 

이 책의 원제목과 부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Slaughterhouse Five or The Children's Crusade : A Duty-Dance With Death

(제5 도살장 혹은 아이들의 십자운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갓 20대 초반이 넘은 주인공은 물론 아직도 10대 후반인 미군 신병들과 독일군 소년병들의 모습에서 중세시절 종교와 정치에 의해 강요되었던 십자군 전쟁에 동원되었던 소년병들의 비극적 운명을 소환합니다. 

 

역사는 그 엄숙한 기록을 통해 십자군 대원들이 단지 무지하고 미개한 사람들일 뿐이었음을, 그들의 동기는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신앙이었음을, 그리고 그들이 지나는 길은 피와 눈물의 길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반면, 중세 무용담은 그들의 경건함과 용맹스러움을 부풀리고, 특유의 대단히 강렬하고 격정적인 색조로 그들의 미덕과 도량, 그들이 자신을 위해 획득한 불멸의 영광과 기독교에 바친위대한 공헌을 그려낸다. 그런데 이렇게 아득바득 싸워서 얻은 성과는 무엇이었던가. 유럽이 수백만의 재화를 허비하고 2백만 명의 피를 흘려, 싸움질 좋아하는 한줌의 기사들이 한 백년 팔레스티나를 소유한 것뿐이다.(27p, 같은 책)

 

전후 심신의 상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주인공은 치료후 전쟁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검안사 직업의 인연으로 맘에 들지는 않지만 재산가(검안소 건물주)의 딸과의 결혼 역시 견딜만 하다고 자위하는 주인공의 대목에서 씁쓸한 웃음이 나오는 것은 저만은 아니겠죠?  

 

그는 시간여행 덕분에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이미 많이 보아서 두사람의 관계가 끝까지 최소한 참을 만은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143p, 같은 책)

 

포로수용소에서 한 밤 중에 병원 약물에 취한 주인공이 철조망에 걸려 버둥거리는 몸짓은 웃기면서도 슬픈 블랙코미디 같습니다. 왜 부제가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인지가 연상되네요. 

 

갑자기 문이 손에 잡혔다. 그 문은 그를 수용소의 밤 속에 풀어 놓았다. 빌리는 시간여행과 모르핀 때문에 온 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철조망 울타리에 몸을 던지자 십여 군데가 철조망에 걸렸다. 빌리는 물러나려고 했지만 가시들이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빌리는 울타리와 잠시 바보 같은 춤을 추었다. 이쪽으로 한 발짝, 저쪽으로 한발짝, 다시 처음으로.(147p, 같은 책)

 

도살장을 개조한 체코국경 근처 독일군의 포로수용소로 가는 기차 여정의 절망스러운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전쟁 막바지에 포로교환을 위해 수용소의 동료포로들과 함께 가는 여정 역시 신산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빌리와 포로들은 이리저리 다니다 가로수 길에 이르렀다. 나무들에잎이 돋고 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아무런 통행도 없었다. 탈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말 두 마리가 끄는 버려진 마차였다. 마차는녹색이었고 관처럼 생긴 것이었다.
새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마리가 빌리 필그림에게 물었다. "짹짹?" (250p, 같은 책)

 

'So it goes(그렇게 가는 거지)'

작품에 수시로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절망적이거나 한 상황에서 입버릇 처럼 자기최면 처럼 되내이는 말 입니다. 

이 말이 책을 다 읽고도 머리속을 입속을 맴돕니다. 

 

지금 브니것의 작품집 <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읽고 있습니다. <제5 도살장> 출간 바로 전해 발간된 작품집인데 25편의 비교적 많은 중단편들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 그의 첫 단편 소설도 물론 실려 있습니다. 작품간 편차가 있는 듯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소재의 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다음은 그의 초기 대표작 <고양이 요람>의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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