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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libros 2020. 1. 28. 09:37

알라딘 eBook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104p) 

SF소설이 평소에 즐겨 읽던 장르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스타워즈와 스타트랙을 보면서 자란 세대라 SF 영화에 대한 일정 정도의 선호도는 있었지만요. 아무래도 문학이라면 이른바 순수문학이 왠지 더 있어보여서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SF는 소수 매니아 층이 읽는 것으로 니치장르라 치부했던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얼마전 SF에 대한 제 이런 편견이 깨진 작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톰 고드윈의 <차가운 방정식(The Cold Equations)> (1954년)이란 고전 단편 SF 소설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스타더스트라는 구조선에 탄 밀항자 소녀에 대한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과연 무엇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을까, 그리고 과학은 이성적인 선택의 결과물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드니 빌뇌브감독의 영화 <컨택트(Arrival)>(2017년)로 먼저 접하고 나서 읽었던 테드 창의 <당신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1998년) 입니다.
그동안 우주를 배경으로 외계인과 지구인간의 갈등을 특수효과를 동원해 눈요기감으로만 보여주는 데 치중했던 SF 영화에만 익숙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또 다른 인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SF 장르도 있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테드 창과 같은 과학도 출신의 신예작가가 쓴 SF장르의 소설이 눈에 띠었습니다. 첫 창작집을 출간하기 위해 북펀드까지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만큼 처음 들어본 그의 이름은 '김초엽' 입니다. 일곱 편의 단편 모두 독특한 소재와 발상이 신선해서 어느 것 하나 완성도의 편차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 입말 아닌 다른 소통 방식을 보여주는 <스펙트럼>,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도서관으로 묘사된 미래 추모공원 <관내분실> 이란 작품이 특히 좋았습니다.

 

스펙트럼을 읽을 땐 김초엽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봤고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손안에서 왠만한 간접적인 경험을 해볼 수 있는 디지털화된 사회입니다. 그리고 오감, 특히 시각과 청각(대화)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그것에서 만족감을 추구하는 즉물적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소통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수단이 입말로만 존재할까 하는, 아님 다른 의사소통 방식은 없을까 하는 발상을 작가는 <스펙트럼>이란 작품에서 보여줍니다. 이건 테드 창의 원작이나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에서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과 언어학자간의 대화에서 혹시 모티브를 받은 것은 아닐까 싶네요. 희진이 조난했었던 곳이라고 여겨지는 행성에 사는 '무리인'들의 의사소통과 기록을 남기는 방식은 언어와 글자가 아니고 우린 스펙트럼 없이는 제대로 그 차이를 볼 수 없는  빛 처럼요.  

 

그렇지만 희진은 이 행성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남기는 일에, 지구의 도구들 없이 행성 자체를 감각으로만 받아들이는 일에 천천히 익숙해져갔다. 오랜 시간동안 희진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 관념적인 것, 감각의 바깥에 있는 것들을 다루어왔다. 원래 희진의 세계는 현미경 속에, 정량화된 데이터 속에, 그래프와 숫자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행성은 오직 희진을 둘러싼 풍경으로만 존재했고 희진은 그 사실을 수용해야 했다. (중략) 루이는 흩어진 그림들을 주워 들었고, 익숙하게 그림들을 정리했다. 루이는 평평한 바위 앞에 앉아 천천히 그림을 살피기 시작했다. 바위 위로 비스듬하게 쏟아지던 햇빛이 점점 더 면적을 키웠다가, 다시 좁아졌다. 루이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림들을 살폈다. 동굴 안의 모든 그림을 빠짐없이 읽으려는 것처럼. 희진은 루이를 지켜보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펙트럼> (25~26p)

 

가족의 소중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주 시공간의 물리적인 거리를 초월하는 무엇인가 싶습니다. '워프 버블'과 '웜 홀'이란 천체물리학적인 용어의 개념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우주 저편에 있는 가족과의 이별과 그리움, 그리고 만남에 대한 갈망이 가슴뭉클하게 합니다. 벌써 1년이 되어 가는군요. 작년 추석 무렵 아내가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스물 두 해가 지나는 동안 물리적인 거리보다도 더 소원해진 마음의 거리가 어쩌면 이렇게 영영 헤어지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후회로 절망했습니다. 죽음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젠가는 헤어지게 마련이지만, 애써 그것을 잊고 지내려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이런 저런 일로 지칠 때 문득 뒤돌아보면, 저 만치 떨어져 있을 줄 알았던 죽음이 어느새 내 옆에 와 있습니다. 물론 언젠가 나도 별의 탄생과 소멸처럼 그와 같이 가야 하겠지만요. ‘시초지’(고향)로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득 남자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먼 곳의 별들은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작고 오래된 셔틀 하나만이 멈춘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정말로 슬렌포니아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남자는 노인이 마지막 여정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56p)

 

황망히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9년이 흘렀습니다. 가까운 곳에 모시고 자주 찾아뵈려 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안되네요. 잘 하겠다고 다짐하다가 또 후회하고, 사는 게 늘 이렇습니다. 기도삽관으로 말 한 마디 못 나누고 한 달반 만에 아버지를 떠나보냈습니다. 중학교 이후로 아버지와는 부자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아주 단편적인 몇몇 장면만 떠오릅니다. <관내분실> 이 그리는 미래 추모공원은 '도서관'이란 아주 친숙한 장소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리움마저도 기억의 저장장치로 거래가 되는 미래 속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낼 수 있다면 저는 좋습니다.

 

사람들은 추모를 위해 도서관을 찾아온다. 추모의 공간은 점점 죽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장소로 변해왔다. 도시 외곽의 거대한 면적을 차지했던 추모 공원에서, 캐비닛에 유골함을 수납한 봉안당으로, 그리고 다시 도서관으로. 
(중략) 

“그래도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마인드들은 우리가 생전에 맺었던 관계들, 우리가 공유했던 것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뇌에 남기는 흔적들과 세상에 남기는 흔적들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억한다는 것이죠."

<관내분실> (76p)

 

홀로 되신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치과치료 받으시는 건 괜찮은지, 식사는 잘 챙겨 드시는지, 같은 시공간에 살면서도 자주 전화도 못 드리고 찾아뵙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도 소용없을 듯합니다. 올해 팔순이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다음 달 멀리 사는 누님과 모처럼 가족 여행을 갑니다. 언제 이런 여행을 또 같이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작은 것이라도 더 늦기 전에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나오는 한 대목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왜냐하면 어느새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멀어져 버린,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들과의 소통의 부재, 소외와 단절의 모습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5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