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허삼관 매혈기> 위화
오랜만에 중국 현대소설 하나를 추천받아 읽게 되었다. 작가 위화(余華, 1960~)가 1996년 출간한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다. 몇년전인가 국내 영화 중에 배우 하정우가 메가폰도 잡은 <허삼관>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는데, 역시 이 작품이 원작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는데, 간결한 문장과 맛깔스런 대사, 그리고 해학적인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비해 내용은 그리 가볍지 만은 않았다.
스토리라인은 복잡하지 않다. 허삼관이란 필부가 인생의 고비고비 마다 피를 팔아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다.
배경은 중국 대륙에 마오쩌뚱에 의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직후로 보이는데, 당시의 시대상을 보면 노동자나 농민 같은 평범한 다수 민중들은 큰 돈을 벌기 보다는 그 날 그날 노동으로 먹고살 던 시절이다. 당시 피를 팔아 손에 쥐는 돈이 35원이었는데, 지금으로 보면 제법 큰 돈벌이가 되었던 것 같다. 물론 당시 피를 판다는 것은 조상을 판다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되었고 더구나 건강에 좋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꺼려했던 것 같다.
조실부모하고 조부댁에 의탁하여 자란 후 누에고치작업장에서 일하던 스무살 무렵 청년 허삼관은 고향사람 방씨와 근룡이를 우연히 만나서 매혈(피를 파는 것)에 대해 알게 된다. 매번 피를 뽑기 전 여덟바가지의 물을 오줌보가 터질 듯 마시고 피를 팔고난 이후에는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냥을 데워서 먹어야 한다'는 철칙을 그들에게서 배우게 된다. 처음 피를 판 돈으로 장가를 가게 되는데, 그 배우자는 당시 '꽈배기 서시'로 이름난 허옥란이다. 그녀에게 음식을 사주고 그 음식값을 치르거나 자기와 결혼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나, 허옥란의 아비에게 같은 성씨를 가진 자기를 사위로 맞는다면 집안의 대도 끊기지 않을 것이라는 다소 황당한 논리를 펴서 결국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을 셋이나 연이어 두는 데,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가 그들이다. 그런데 첫째 일락이가 크면서 자신을 닮지 않다는 것을 보면서 아내 허옥란을 추궁한 끝에 하소용이란 자의 아이임이 밝혀진다. 요즘 같이 DNA 검사란게 없던 시절 혈액형도 모르던 시절, 과연 일락이가 다른 외모만으로, 그리고 허옥란이 한 번 다른 자와 결혼전 관계를 갖았다는 것 만으로 혈연이다 아니다를 단정짓는 모습이 씁쓸하다.
언제 두 번째 피를 파나 하는가 싶었는데, 결국 사고를 친 첫째 일락이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금 피를 팔게 된다. 이후 결혼전 아내감으로 허옥란과 저울질하던 임분방과의 우발적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세번째 피를 팔고, 극심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어 가족을 위해 네번째 피를 판다. 그런데 피를 판돈으로 첫째 일락이만 빼고 나머지 가족들과 국수를 먹으러 간다. 그의 논리는 '피를 판 돈은 목숨값인데, 피가 섞이지 않은 일락이에겐 그 목숨값을 나눠줄 수 없다'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허삼관은 결국 이때문에 집을 나갔던 일락이를 업고 오면서 결국 국수집으로 데려가게 되고 부자간의 화해가 이루어 진다.
문화혁명기, 아내 허옥란이 무고에 의해 큰 고초를 치르고, 세 아들 중 막내만 집에 남고 첫째와 둘째 아들을 농촌 생산대 보낼 수 밖에 없게 된다. 몸이 쇠약해진 일락이를 위해 그리고 이락이의 생산대장에게 잘보이기 위해 허삼관은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매혈을 하게 된다. 이후 간염에 걸린 일락이를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고 결국은 아들이 입원한 상해로 향하는 여정에서 네번의 매혈을 더 하게 된다. 그 와중에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 허삼관은 그에게 매혈로 인도했던 고향사람 방씨와 근룡이의 불행한 근황을 듣게 된다. 피붙이가 아니라서 한때 제 아들이 아니라 했던 일락이를 위해 결국 자신의 피를 팔고 목숨마저 잃을 뻔 하는 허삼관의 모습에서 우린 아비의 '내리사랑'의 마음을 보게 된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 했던가?
허삼관 나이 이제 예순. '돼지간볶음과 데운 황주 두냥'을 먹고 싶어 처음으로 자신만을 위한 매혈을 하려 한다.
"이전에 돼지간볶음에 황주를 곁들여 먹은 건 순전히 피를 팔았기 때문이지만, 오늘은 거꾸로 돼지간볶음에 황주를 곁들여 먹기 위해 피를 파는 거야."
하지만 젊은 혈두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고 거절당하게 된다. 더 이상 피를 팔 수 없다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 없이 울던 허삼관은 결국 아내 허옥란의 손에 이끌려 승리반점으로 가게 되고 돼지간볶음 세접시와 황주 한병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이 소설은 그리 길지 않은 내용에 쉽게 읽혀진다. 작가의 간결하고 위트있는 문장에 등장인물들은 양념이 잘 베인 음식처럼 잘 녹아들어 있다. 다소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인 언행의 인물들도 작가 특유의 글맛을 살리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게 보인다. 어렵던 시절이지만 가족, 이웃, 마을, 그리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조차도 사람의 인정 냄새게 폴폴 난다. 원수같이 데거리를 했던 이웃들도 허삼관의 도움 요청을 외면하지 않는다. 상해가는 여정에서 피를 연속으로 네번이나 뽑다가 때로 쓰러지고 주저앉던 허삼관을 살리고 일으켜 세운 것도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1950년대부터 1990년 중반 정도의 중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어쩌면 그대로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우리 부모세대의 삶이 아닐까 싶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저녁 퇴근길 포장마차나 대포집에서 막창에 막걸리나 소주 한잔으로 그날의 피로를 풀었던 우리의 아버지들이 생계를 위해 피를 팔고 '돼지간볶음에 데운 황주 두냥'을 맛있게 먹던 허삼관이 아닐까. 그리고 어느새 나도 그런 허삼관의 세월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
위화의 또 다른 소설 <인생>도 읽어보고 싶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장이모우감독이 단든 영화 <살아간다는 것(活着)>(1994)도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