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os 2019. 1. 23. 21:49

<아버지> 김정현 장편소설



벗들과 격주로 한 번씩 책이나 영화 등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에 발제한 친구가 영화 한 편과 이 소설을 다시 읽어 보자 해서 다시 찾아 본 책이 바로 <아버지> 이다. 첫 출간이 IMF 한파가 몰아치기 직전인 1996년 7월이니 벌써 스물 세 해가 지났다.

통속 소설이라고도 불리고 대중 소설로도 읽히는 그런 류의 책이었다. 사서 보기는 좀 그래서 동네 도서관서 대출을 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주인공의 신파조 스토리에 330쪽의 분량이 2~3시간 안에 읽힐 만큼 어렵지 않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읽고 난 느낌을 한마디로 말하기엔 그 소재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나뿐 아니라 부모님을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부모가 된 사람들에겐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된다. 

 

한정수. 50대 초반 우리 또래 중앙부처 공무원이자 두 아이를 둔 가장.

그는 평생 자기 삶보단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늦은 나이에 지방대를 들어가지만 바로 행정고시에 합격한다. 맛있고 비싼 음식 앞에서도 주저하고, 현금 인출에 대해 아내에게 들을 잔소리를 우려해 차라리 현금서비스를 받았던 그런 사람이다. 큰 딸과 작은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 표현이 서툴고,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사랑표현을 못하는 중년 남성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그렇고 우리 주변 사람들도 그렇듯 전형적 인물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주인공(한정수)이 친구인 남박사로부터 췌장암 말기로 장기에 벌써 전이가 다 된 상태라 어찌 손을 쓸 수도 없는 5개월 시한부인생이란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치료에 대한 것 보다는 뒤에 남겨질 아내와 자식의 문제를 더 걱정하고, 아내에게 작은 제과점이라도 얻어주려 한다. 친구의 처지를 아파하는 남박사와 한정수는 포장마차를 찾아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가혹한 운명을 한탄한다. 그러다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이 된 소령과의 만남과 짧은 여행. 매일 같이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는 가장에 대한 아내 영신과 큰 딸의 오해. 그리고 예정된 수순인 입원과 마지막 주인공의 결심. 이야기는 이렇게 숨가쁘게 이어진다. 


발제한 친구가 정리한 생각해볼꺼리는 다음과 같았고, 하나씩 나에게도 대입해서 생각해 보았고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1. 나의 아버지는 어떤 형태의 가장이었나?

2. 나의 어머니가 영신과 다른점은?

3. 나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어떤 대상이었나? 소설 속의 지원과는 어느 점에서 닮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4. 나에게는 남박사 같은 친구가 있는가?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비밀을 들어줄 친구?

5.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내게 ‘소령’같은 존재는 늘 있었나? 아니면, 애써 부정해 왔나?

6. 나에게 100 일 (3 달 남짓) 생이 남았다면, 하고 싶은 (혹은 해야할) 3 가지는?

7. 장기기증에 대한 나의 생각은? 고귀한 희생인가? 신과 부모의 뜻을 거스른 자기 학대인가?

8. 가부장제라는 제도 하에,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성역할에 너무 얽매여 살지는 않았나?

9. 안락사/존엄사는 인간의 권리인가? 아니면 신의 뜻을 저버리는 인간의 오만인가?

10. 인간에게 가부장제적 가족제도는 본능과 부합되는 것인가? 아니면 압제의 산물인가?

 

5년전 섣달 그믐날 돌아가신 아버지는 내게 어떤 존재였었나, 홀로 남으신 어머니는 또 내게 어떤 분인가. 가장으로서의 삶은 내게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보면 좋았던 행복했던 순간 보다는 고통스럽고 우울했던 그런 기억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나의 생각은 현실을 담고 있다. 큰 딸 희원이로부터 날아든 비수와 같던 편지를 보며 고통받던 주인공.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 한 통이 사람의 마음을 천당과 지옥으로 오갈 수도 있게 만든다. 그에 비해 내가 얼마전 큰 아이 생일날 전해준 편지는 내리사랑의 서툰 표현이라고 안위하고 싶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의 마지막 짧은 편지로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이렇게 보내 줘서 뭐라 고맙다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 미리 써두는 것이기는 하오만 당신을 믿고 있소.

당신이 좋았소. 난 행복한 사람이오. 조금 일찍 간다고 가여이 여기지는 마시오.

고운 당신, 착한 아이들, 좋은 친구들, 미더웠던 동료들, 나를 위해 장어를 사러 다니던 포장마차 주인, 그리고 당신이 아는 또 한 사람. 

그들 모두 사람 냄새가 났던 좋은 사람들이오. 특히 한 사람, 당신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하오.

아이들을 잘 길러 주시오.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으로 말이오.

사람 냄새가 그리운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오. 메마른 이 세상, 우린 사람으로 남읍시다. 

당신과 아이들이 사람 냄새를 그리워할까 염려되오. 그러나 둘러보면 많이 있을 거요. 그래서 나는 이제 마음 놓고 눈을 감을까 하오. 

내 하얀 구름색 머플러는 나를 태운 뼈와 함께 먼 하늘로 날려 주오. 아무래도 미덥지 않소만...... 당신 마음대로 하구려.

저승이나 다음 생이 있다면 당신을 또 만나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사람 냄새가 그리우면 또 만납시다.

정말 사랑했소.


추신: 이건 지원이에게 배운 거요.

지원이에게 난 처음부터 그게 사랑이란 걸 알았다고 전해주시오. 

희원이에게도 사랑한다고 전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