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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libros 2019. 1. 12. 14:56

셸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죽음이란 주제를 놓고 삶과 철학을 논하는 책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영혼이 존재하는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과연 '나쁜'것일까' 등 죽음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따져본다. 저자인 셸리 케이건 예일대 철학과교수는 신입생들에게 '죽음(Death)' 이란 주제로 철학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26편으로 구성된 유투브 동영상(https://youtu.be/p2J7wSuFRl8)을 보면, 이 강연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총 14장으로 엮은 책이란 것을 금방 알 게 된다. 


Prologue

목차

1장. 삶이 끝난후에도 삶은 계속되는가

2장. 영혼은 존재하는가

3장. 육체없이 정신만 존재할 수 있는가(데카르트)

4장.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가 (플라톤)

5장. 나는 왜 내가 될 수 있는가

6장. 나는 영혼인가 육체인가 인격인가

7장. 죽음의 본질에 관하여

8장. 죽음에 관한 두 가지 놀라운 주장

9장. 죽음은 나쁜 것인가 (에피쿠로스)

10장. 영원한 삶에 관하여

11장.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12장.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무거움

13장.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

14장. 자살에 관하여: 죽음은 선택인가 삶의 포기인가

Epilogue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가', '무엇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가'

여기서 인간을 바라보는 두 가지 (형이상학적) 관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자신이 일원론/물리주의자라고 밝히고 있고, 논리적으로 이원론과 관련된 명제들을 반박하고 있다. 

* 이원론(Dualism) : 육체+영혼

* 일원론(Monism) : 육체 → 물리주의 (Physicalism)


'사후의 삶이 있는가', '사후의 삶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죽음은 곧 삶의 끝인데,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그렇다면 '육체의 죽음 이후에 나는 계속 존재하는가(Will I survive the death of my body?)'라는 질문에는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여기서 비물질적 영혼이 정말 존재한다면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건가? '영혼의 불멸성'을 확신했던 소크라테스는 제자와 친구들에 둘러쌓여 태연히 독배를 마셨고,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여기서 '이데아'란 개념을 창안한다. 

반면에 물리주의에서는 육체만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이야기 한다. 즉 인간(Person)은 다양한 'P기능'을 하는 육체이며, 우리가 흔히 정신이라 이야기하는 것도 육체의 고차원적 기능을 담당하는 도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곧 P기능의 종말이며, 정신의 존재는 인정하나 영혼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육체는 누가 조정하는가' 

물리법칙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결정론(determinism)이라면 자유의지(free will)는 그 대척점에 있고 '양립불가(incompatible)'하다.

저자는 '이원론자'의 다음과 같은 명제와 주장에 대해 그것이 타당한 것인지 묻는다.  

1)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2)결정론에 지배를 받는 존재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3)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

4)그러므로 인간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기초물리학 법칙은 결정론이 아니고 확률적(probabilistic) 이다.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을 예로 들면,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 붕괴하는 방사능 원자의 경우 24시간 동안 ‘붕괴’될 가능성이 80% 라면 그렇지 않을 확률이 20%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초물리학 법칙은 인과론적인 결정론이 아니고, 다분히 '확률적(probabilistic)'이다. 

또한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저자는 이원론에서 영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격 관점에서의 정체성을 이야기 한다. 여기서 나는 저자가 일원론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조금은 논리적인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1995)>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결정론과 자유의지 립하는 듯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네트워크에 존재하며 스스로 생명력을 갖게 된 프로그램'인 인형사(人形使い; The Puppet Master)가 '두뇌의 일부만 남은 전뇌(電腦) 사이보그' 인간 쿠사나키소령을 해킹하여 새로운 인격으로 탄생한다. 과연 그의 육체(의체)를 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물질과 존재에 대한 이 철학적인 물음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죽음의 본질에 관하여 좀 더 생각해 보자. 죽음은 나쁜것인가?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나쁘다 좋다의 판단 기준이라기 보다는 죽음 때문에 더 누릴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들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상대적으로 나쁜 것이고, 이것을 '박탈이론'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은 ‘언제’ 나쁜가? 여기서 쾌락주의를 대표하는 에피쿠로스의 입장을 인용해 보자.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직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본질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는데, 흔히 좋은 것은 '쾌락'이고 나쁜 것은 '고통'이라 한다. 따라서 행복이란 쾌락을 경험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 <The Matrix>에서 모피어스는 주인공 네오에게 두 개의 알약을 건넨다. 파란알약을 먹으면 가공의 현실(매트릭스)속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반면 빨간알약을 먹으면 고통속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네오는 빨간알약을 선택한다. 조금은 극단적인 상황설정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저자가 얘기한 '경험기계'에 연결된 삶이 이 영화에서는 가상현실의 매트릭스 기계세계의 에너지원으로 전락한 인간숙주의 모습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무거움'으로 저자는 다음의 네가지를 든다. 

 1. 반드시 죽는다 - 죽음의 필연성

 2. 얼마나 살지 모른다 - 죽음의 가변성

 3. 언제 죽을지 모른다 - 죽음의 예측불가능성

 4.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 죽음의 편재성

여기서 1번과 2번은 누구나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부정할 수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3번과 4번 때문에 죽음이란 상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는 동안 후회없이 가능한 가치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존재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특정한 조합으로 이뤄진 형이상학적 합성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람이란 결국 '삶과 죽음의 조합으로써 만들어내는 전반적인 가치'를 지향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그랬던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이라고.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19>(1982)의 마지막 장면에서 복제인간(Replicant; 리플리컨트) 로이(룻거 하우어)는 블레이트러너 데커(해리슨 포드)를 살려준뒤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며 4년의 시한부 삶을 마감한다.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그 모든 시간들은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